개.철.이

이중성과 상보성 -- 인식의 한계

chan's story 2007. 7. 12. 16:13
출처 블로그 > 아깨비와 네잎 크로바...
원본 http://blog.naver.com/aunijin/40031974135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다.

보라는 달은 안보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달은 언어와 개념으로 드러나지 않는 최상의 진리를, 손가락은 이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자를 나타내는 불교에서의 비유이다.

일상생활과는 별로 관계없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우리 주변에도 우리가 설정하는 관념이나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나타내기 어려운 것들이 수없이 많다.

밤하늘의 별을 헤는 이의 마음이나 '종소리 저문 산림 속 그윽한 수녀' 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아주 가깝게는 콜라의 맛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 하다.


객관세계를 다루는 과학에서도 양자역학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였다. 

20세기 이전의 물리학에서는 객관적 실재를 수학적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언제나 가능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는 신념이 자연과학의 객관성을 보장해주는 것 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파동성과 입자성에 대한 논의 이후 그 근원에서 부터 붕괴 되었다.


고전물리학에서 입자성과 파동성은 전혀 다른 물리적 성질이다.

돌과 같은 입자는 돌이 이동하면서 그 에너지도 전달된다.

그러나 파동의 경우에는 물체 자체는 이동하지 않고 에너지만 이동한다.

우리가 말할 때 성대에 있던 공기 분자가 상대방의 귀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공기의 진동 에너지 만이 전달된다.


잘익은 가을 논의 이삭들이 출렁 일때, 벼 이삭 자체는 움직이지 않지만 이삭의 물결이 전달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고전 물리학에서 입자와 파동은 어느 하나이면 다른 것 일수 없는 서로 배타적인 개념이다.

입자와 파동 개념의 배타성은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극적으로 변화 되었다.


빛은 파동의 전형적인 특성인 간섭과 회절 현상을 보이므로, 분명히 파동이어야 한다.

그런데 광전효과 등의 어떤 상황에서는 빛이 입자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입자라고 생각 되었던 전자는 상황에 따라서 파동성을 갖는 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국, 파동으로 생각하였던 빛은 입자성을 동시에 가지며, 입지라고 생각하였던 전자는 파동성을 동시에 가진다.

어느 것이든 기본 물체는 입자성과 파동성을 동시에 지닌다.

이를 이중성 Duality 이라고 한다.

그래서 양자역학의 기초를 완성한 닐스 보어는 파동성과 입자성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고전 물리학에서의 체계를 버리고 ,

이들을 서로 보완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를 상보성 Complementarity 이라고 한다.

자연 세계는 입자와 파동의 상보적인 체계이다.

그러나 우리의 개념 체계 안에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단어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입자나 파동 이라는 개념은 대상의 일면을 표현하는 것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어느 하나로만 대상을 파악하려 한다면 반드시 모순에 이르게 된다.

이는 물리적 개념이 대상의 속성을 완전하게 포착하지 못할 수 있다는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래서 입자 아니면 파동이라는 양자택일의 관점을 고집하는 한,

그것이 아무리 간단한 것이라도 대상의 전존재는 결코 그러나지 않는다.

자연은 언어나 개념이 지칭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풍부한 것이다



양형진 교수의 글에서 (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


출  처 : 서프라이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