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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의 문제를 최초로 본격적인 연구를 한 사람은 구스타프 칼 융이다. 그는 정신적 사건과 외부적 사건의 비인과적 연결고리에 대한 관점에서 동시성을 연구하고 사례를 수집하였다. 간단한 예를 들면, 전쟁에 나간 아들을 둔 어머니는 어느날 불현듯 자신의 아들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예감하게 된다. 그 예감은 다음날 아들의 전사통지로 확인이 된다. 우연히 잊었던 옛 친구가 생각이 난다. 전화의 벨이 울린다. 전화를 받고서야, 비로서 왜 갑자기 그 친구를 기억해 내었는지 깨닫는다. 바로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는 모든 사람이 격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러한 일치가 모두 우연이었을까? 그렇다면, 왜 모든 인간이 논리나 인과를 초월하는 우연의 일치를 경험할까? 우리의 삶은 우리의 불롼전한 이성적인 사유로서만은 이해할 수 없는 수 많은 신비에 쌓여있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신비의 영역을 평생 추구한 사람이 바로 칼 융이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러한 신비의 경험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칼 융은 이러한 동시성의 사례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학자로서는 내놓기 어려운 하나의 설명방법을 제시했다.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는 우리가 파악한 인과율 혹은 물리적 법칙을 초월한 또 다른 연결고리에 의해 직조되었다는 가설이다. 물론 이러한 가설은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보면 신비와 초월의 영역에 속한다. 증명도 혹은 부정도 될 수 없는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칼 융의 위대한 점은 정신의 현상적인 분석을 넘어서서 그 배후에 존재하는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 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그의 초월적 세계에 대한 관심은 정신분석학상 가장 위대한 업적중의 하나인 “자기(self)” 와 “자아(ego)” 개념의 설정에서 나타난다.
자아(ego)는 Freud 의 현재의식에 해당하는 일상적 우리이다. Jung 은 하나의 개체로서 존재하는 자아(ego)의 개체성을 뛰어넘어 외부와 연결된 또 하나의 우리로서의 자기(self)가 우리의 내부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Freud 의 의식/무의식 개념에 의하면 우리는 바다에 떠 있는 빙산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가 우리라고 생각하는 현재의식은 빙산의 일부에 불과하고, 그 의식은 바닷속에 감추어져 있는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칼 융의 자기개념에 의하면, 우리들은 바다에 떠 있는 섬과 같은 존재이다. 그 각자의 섬들은 각자 독립된 존재처럼 보이지만, 바닷속에서 관찰하면 육지로 연결된 하나의 부분들인 것이다.
칼 융에 의하면, 인류는 , 더 나아가, 인류와 이 세계는 하나의 뿌리를 통해 연결되 있는 그 무엇이다. 전쟁터에 나간 어머니와 아들은 , 그리고, 나와 나의 그리운 친구는 모두 집단적인 무의식의 세계에서 연결되어 있는 일체의 부분들 이라는 가설을 내포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 연결방식을 이해하고 있지 못 할 뿐이다.
동시성의 신비는 사실상 우리의 일상적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당신과 나는 이 순간 대화를 나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나는 이 순간 당신의 과거의 환영과 소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당신이라는 정보가 나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빛의 속도가 나에게 도달하는 만큼의 시간이 경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현재의 시점에서 볼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당신은 항상 과거의 당신일 뿐 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과거의 이순신장군이 존재하지 않듯이 나는 항상 이 순간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당신과 소통을 하고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당신과 이 순간 동시성속에서 함께 존재하며 소통을 한다. 이러한 동시성의 신비는 우리의 존재양식은 빛의 속도와 공간을 뛰어넘는 또 다른 초월적인 매개방식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보고 느끼는 별은 100만년전의 별일 수 밖에 없지만, 나는 이 순간 별과 함께 동시적인 관계를 맺는다. 나와 당신은, 그리고 나와 저 별은, 우리의 관계속에서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함께 “현재적 사건”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현재의 시점에서는 영원히 떨어져 있어야 할 당신과 나는, 그리고 나와 별은 나의 삶속에서 엄연히 나와 동시적으로 존재함을 어떻게 설명을 하여야 할까? 시간과 공간, 그리고 빛의 속도를 뛰어넘어, 당신과 나를 동시적으로 연결하는 고리 혹은 그 매캐니즘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우리는 이러한 동시성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하여 몇개의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사실상 당신과 나를 갈라놓은 시간과 공간은 실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은 우리의 인식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에 불과하다는 가설이다. 이러한 가설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그렇게 엉뚱한 설명만은 아니다. 사실상 현대과학은 아직까지도, 시간과 공간의 실체를 발견해 본적이 없다. 수많은 철학자나 성현들도 사실상 시간은 인간의 경험속에서만 인식되는 그 무엇이지,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는 견해를 제시해 왔다. 다시 말하면, 시간과 공간이란 우리의 정신이 이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불과다는 가정이다. 그렇다면, 동시성의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선 전혀 새로운 이해의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두번째는 당신과 나는 두개의 독립되고 왼결된 개체가 아니라는 설명이다. 당신과 나는 마치 EPR paradox에서 관찰되는 전자한쌍이 보여주는 반응의 비국소성처럼, 국소성(locality)을 뛰어넘어 “상호내면적인 관계속의 일부로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함께 존재”하는 불가분적인 하나의 다른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우리의 불완전한 언어의 한계와 지금까지 지녀온 물리적 실재관과 세계관을 뛰어넘는 새로운 이해방식이다.
증명될 수 없는 이러한 가설 혹은 설명의 방식들은 어떠한 설득력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이 순간 사변적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까지 우리들의 이해방식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때 무한한 여백을 인간에게 남겨 두신것 같다. 우리들은 우리자신의 모습을 이 불가해한 세계속에서 스스로 그려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epr paradox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두개의 소립자(e1, e2)를 각자 다른 방향으로 쏜 다음에 , 그중 하나인 e1 에 자석으로 전자장을 걸으면 e1 의 궤적은 전자장의 영향을 받아 휘게 된다. 문제는 그 순간 다른방향으로 쏜 소립자인 e2 가 e1 과 똑같은 시점에서 영향을 받고 그 궤적인 휜다는 실험결과이다. 마치 서울에 사는 일난성 쌍둥이중의 한명의 머리에 충격을 가하면, 뉴욕에 사는 쌍둥이의 머리에 통증이 느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순간, 물리학자와 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려고 수 많은 가설들을 내어 놓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개념중의 하나가 국소성(locality) 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책상위에 놓여있는 사과는 그 책상위에 놓여있을 뿐이지, 동시에 화성의 표면위에 놓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적인 실재관이다. 그러나, epr pradox 는 그러한 실재관을 파기시킨다. 우리는 이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물리적인 실험결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형이상학적인 인식론의 영역과 어쩔 수 없이 만난다. 칼 융의 자기(self) 개념도 우리자신의 존재양식이 국소성을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출 처 : 서프라이즈(문화예술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