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조업을 엔진으로 도시가 발전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위기의 도시들은 새로운 엔진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대개 문화도시, 관광도시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국의 도시들도 영화세트장과 먹을거리, 축제의 깃발을 휘날리며 문화, 관광의 격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새로운 도시의 시대가 왔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도시, 그 위에 인간을 중심으로 한 문화가 차곡차곡 쌓여 가는 도시가 우리가 그리는 모습이 될 것이다.
본보의 신년기획 ‘도시, 미래로 미래로’는 산업화 이후 새로운 방식으로 경쟁력을 갖게 된 도시들을 분석할 계획이다. 도시·건축 전문가들과 본보 기자들이 특별취재단을 이뤄 세계 20여 개 도시를 찾아간다.》
네덜란드 제2의 도시인 로테르담. 도시를 관통하는 마스 강 남북을 잇는 다리를 로테르담 시민들은 ‘백조’라고 부른다. 다리의 공식명칭은 에라스무스. 이 도시 출신인 중세의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를 기려 붙여진 이름이다. 서울의 올림픽대교와 비슷한 형식의 사장교(斜張橋)인 이 다리는 1996년 준공 이후 명실상부한 시의 상징이 되었다.
다리에는 자동차, 전차, 자전거, 보행인의 통로가 구분돼 있다. 다리는 넓지만 길은 좁다는 자동차 운전자들의 불평도 있지만 자동차가 다른 공간을 침범할 수는 없다.
에라스무스 다리의 북쪽 강변에는 1940, 1945라는 숫자가 새겨진 조형물이 서 있다. 로테르담이 독일에 침공 당해 나치의 지배를 받던 기간이다. 1940년 5월 14일. 바로 이날 60대의 나치 폭격기가 로테르담 도심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그러나 로테르담은 옛 도시를 복구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의 실험적인 이론을 통한 도시계획으로 전혀 새로운 도시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느 유럽의 역사 도시와 달리 로테르담이 넓고 조직적인 도심 도로체계를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결과물이다.
○ 끊임없는 실험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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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테르담은 라인 강 어귀를 틀어쥐고 생긴 도시다. 유럽이 세계로 나가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위치의 장점을 등에 업고 로테르담은 1962년 이후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최대의 항구도시로 군림해 왔다. 그러나 2002년에는 싱가포르에, 2004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 추월당해 3위로 내려앉았다. 항구가 수축한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의 경제규모가 빠르게 커진 것이다.
로테르담은 변하고 있다. 세계 항구의 수도에서 건축 실험의 수도로 바뀌고 있다. 현대건축으로 문화도시로서의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건축 양식의 전통이 아닌 건축 실험의 전통이 폭격 뒤에도 뚜렷이 살아남았다.
세계 최초로 근대적 보행자 전용 가로를 만든 도시가 바로 로테르담이다. 20세기 초반 열악한 노동자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건축가들의 실험적인 주거안을 실현한 곳이 로테르담이다.
새로운 도시에 대한 생각이 끊임없이 로테르담의 건축가들에게서 공상처럼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 새로운 건축에 대한 전통이 폭격 이후 이 도시를 복원이 아닌 실험의 길로 인도했다.
국립 네덜란드건축협회(NAI)가 수도인 암스테르담이 아니고 로테르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은 이 도시가 현대건축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화물선에 얹힌 세계가 로테르담의 항구를 통해 드나들었다면 지금 세계의 건축은 이 네덜란드건축협회로 드나들고 있다. 세계 최대의 건축박물관을 자임하는 이 협회는 전시, 출판을 통해 로테르담을 건축의 실리콘밸리에서 건축의 수도로 만들어 나가고 있다. 로테르담 건축비엔날레는 이런 배경으로 2003년부터 개최되고 있다.
네덜란드의 젊은 건축가들은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들이 전시회나 저술을 통해 끊임없는 도시와 건축의 대안을 만들도록 중앙정부가 장려하고 있는 것이다. 로테르담은 그 꿈을 펴 보이는 장소가 되고 있다.
모든 실험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모험이 박수갈채 속에 마무리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실험 없이 결과물을 만들 수는 없다.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의 전통이 로테르담에서 건축으로 표현되고 있다. 로테르담의 실험적인 젊은 건축가들은 지금 세계의 현대건축을 장악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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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테르담은 건축가들의 캔버스
로테르담에 덩치 큰 백인은 60만 명 남짓한 시 인구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모로코, 터키, 인도네시아를 비롯해 160개국에 이르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이 도시에 살고 있다. 국적, 인종, 종교, 가치관이 종횡무진으로 교차하는 이들이 모두 로테르담의 시민이다.
로테르담에서 도시정책의 근간은 이런 도시구성원들이 얼마나 잘 섞여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도심에 젊은 저소득층만 모여 산다는 자각은 도심 가까운 강변에 고급 아파트를 짓도록 장려하는 정책을 만들었다.
다양성의 추구는 건축 스타일에도 적용된다. 이 도시에서 건축가는 도시라는 캔버스 위에 마음껏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비유된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다소 기괴하기도 하고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건물이 유독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건축가들이 자신의 실력과 구상을 실전에서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보장된’ 무대라고 할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로테르담 지하철 블라크 역 앞에 있는 큐브하우스다. 1984년 해체주의 건축가 피트 블룸(1934∼1999)의 설계로 만들어진 이 기괴한 아파트는 사각 기둥 위에 정육면체가 올려져 있는 형태. 모두 38개의 작은 큐브(1개 큐브가 집 1채)와 2개의 대형 큐브, 14개의 상점 및 사무공간이 서로 맞물려 구성된 작은 아파트 단지다.
이 정육면체의 공간에 사람이 산다는 것도 놀랍지만 단지가 도로를 가로지르는 육교 위에 건설됐다는 점도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 그러나 미처 완공되기도 전에 분양이 모두 끝난 ‘대박’ 아파트이기도 하다.
건축가들의 실험적인 시도를 로테르담 주민들이 기꺼이 이해하고 함께 즐긴다는 점이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건축 실험이 끊임없이 이뤄질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이다.
각각의 큐브, 즉 아파트는 3층으로 이뤄졌으며 모두 합쳐 30평(100m²) 정도의 크기. 중앙의 나선형 계단이 아래 층 입구에서 3층까지 관통해 있고 그 주위를 돌며 식당, 거실, 침실 등이 배열된 구조다. 주로 1층은 거실과 식당 등으로, 2층은 서재 침실 욕실 등이, 3층은 온실이나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활용된다. 피라미드 2개의 밑변을 붙여 놓은 모양이라 3층 공간은 협소하지만 사방이 모두 창문인 특징을 살려 침실로 쓰는 사람도 있다.
큐브하우스의 주민인 에이블린(32·여) 씨는 “여기서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약간의 상상력과 적응력”이라고 말했다. “한 사람이 간신히 누울 수 있는 모서리 공간에 부엌을 배치하려면 많은 상상력이 필요하다. 사랑, 유연성, 적응, 창조, 재미 등이 바로 이곳이 주는 매력”이라고 말했다.
로테르담=서 현 교수 한양대 건축학부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 로테르담의 건축가들
20세기 초반부터 로테르담은 세계 건축계의 중심에 있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옛 증권거래소를 설계한 베를라헤나 화가 몬드리안과 함께 ‘데 스테일(신조형주의)’운동을 일으킨 반 두스뷔르흐, 리트벨트 등이 세계 건축계에 ‘네덜란드적인 것’의 이미지를 심었다.
로테르담이 세계 건축계의 메카라는 것은 이곳을 근거로 활동하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면면으로도 확인된다. 그중에서도 손꼽히는 인물이 로테르담에 본사를 둔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의 공동 설립자이자 미국 하버드대 교수인 램 콜하스.
독일 베를린에 있는 네덜란드 대사관 설계로 올해 유럽연합(EU) 건축상을 수상한 램 콜하스와 OMA는 건축과 도시계획 분야의 선두그룹이다. 그가 포르투갈 제2의 항구도시인 포르투에 설계한 콘서트홀 ‘카사 다 무지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로스앤젤레스의 디즈니 홀, 한스 샤로운의 베를린 필하모닉 홀과 함께 지난 100년간 지어진 콘서트홀 중 가장 독창적인 것”이라고 평했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 미술관과 2005년 8월 개관한 서울대 미술관도 그의 손길이 거쳐 갔다.
암스테르담 오소도프 지역의 실버타운 보조코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설계그룹 MVRDV도 로테르담의 건축가들 중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건물 옆면이 마치 성냥갑이 튀어나오듯 불규칙적으로 돌출한 형태의 이 건물은 무질서 속의 조화가 백미. MVRDV는 구성원인 위니 마스, 야코프 반 리스, 나탈리 드 브리스 3인의 이름 머리글자를 모은 것이다.
이들은 최근 경기 안양시에서 열린 제1회 안양공공예술 프로젝트에 15m의 전망탑을 출품해 2006년 1월 일반 공개를 앞두고 있다.
로테르담 해안과 항구 개발 프로젝트, 싱가포르 부오나 공원, 영국 런던의 칙스윅 공원 등을 설계한 건축그룹 ‘West 8’도 주요 로테르담 인맥이다.
로테르담=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참여 전문가>
○서현(43·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서울대 건축학과, 대학원 졸
미국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 석사
저서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등
○이종호(49·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한양대 졸
예술종합학교 sa도시건축연구소장
대표작 박수근미술관 등
○이영범(43·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서울대 건축학과, 대학원 졸
영국 AA스쿨 박사
‘도시연대’ 커뮤니티 디자인센터장
○정현아(36·DIA건축연구소 대표)
홍익대, 대학원 졸
미국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 석사
[도시, 미래로 미래로]<2>미국의 샌안토니오 샌안토니오의 발전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샌안토니오 강의 역사와 함께한다. 처음에는 단지 반복되는 홍수를 이겨내기 위해 강을 정비하기 시작했지만 반세기 넘게 사업이 지속되면서 강이 도시를 더욱 풍성하고 친환경적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샌안토니오는 강이 도시생활의 중심이 되고 도시의 가치를 극대화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 물길을 따라 시민의 삶과 공간을 엮어
텍사스 주의 샌안토니오는 미국에서 여덟 번째로 큰, 인구 182만여 명의 도시다. 물리적으로는 넓지만, 다운타운의 분위기는 ‘작은 도시’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보행자의 도시다.
도시를 감싸는 순환도로나 그 순환도로를 관통해 도심으로 모아지는 간선도로들의 체계, 시 외곽의 미국 최대 규모 육·해군 기지, 의료 생물 기술 관련 학술 컨벤션센터 등의 존재는 이 도시가 미국 서남부를 대표하는 큰 도시임을 말해 준다. 하지만 도심을 구획 짓는 좁은 격자 패턴이나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적들, 멕시코 문화의 흔적들은 강하고 독립적인 개성을 풍기는 특유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 내며 이 도시에 걸어다닐 만한, 따뜻하고 정겨운 기운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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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안토니오 시가 조성한 리버워크(River Walk)는 그런 점에서 시민들의 삶과 공간을 유기적으로 직조해 낸 기획이다. 다운타운을 고리 모양으로 감싸며 도는 강변길인 리버워크는 도심 도로 한 층 아래 강물을 흐르게 하고, 강물 바로 옆으로 산책로를 만들었다. 이 산책로에는 카페와 레스토랑, 호텔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아래층 산책로에서 자라난 나무는 무성하게 뻗어나가 리버워크 위층의 도시공간과 아래층 물가 산책로를 하나로 엮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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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업문화공간과 강의 결합
리버워크의 시작은 192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강물의 범람을 막기 위한 댐과 수로 건설 등 제반시설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강을 도시의 미적 요소로 적극적으로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보행자다리, 산책로 등이 설치됐다. 1960년대부터는 전체 강 개발의 장기 구상 아래, 10년 단위의 세부 계획을 세워 자본을 확보하고, 강변 환경의 재편성을 위해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건축가 R H H 허그먼은 도심의 수많은 상업시설과 문화시설을 강과 근접거리에 집중시키는 계획을 제안했고, 시는 강 주변 상업시설의 디자인을 모니터하고 관리하는 자문위원회(Riverwalk Advisory Commission)를 만들어 강을 지역별로 특성화하여 발전시키는 정책적 토대를 마련했다.
지금의 리버워크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을 가능케 한 데에는 여러 행정조직이 있었지만, 그중 1937년 출범한 SARA(San Antonio River Authority)가 대표적이다. 강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과 개발 방식을 결정하는 반(半)공공기관인 SARA는 강변 전체를 특성에 따라 네 개 영역으로 구분하여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샌안토니오 시의 리버워크에서 주목할 것은 강이 단지 자연환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상업 문화공간과 연계되어 생활과 직접적으로 관계돼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우리 도시에서 하천을 재생하며 간과한 부분일 것이다.
도시는 이제 표현과 소비의 장소다. 도시의 가장 생동감 있는 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소비가 이루어지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문화가 만들어지는 순간일 것이다. 청계천 복원의 경우, 자연을 재생하기는 했지만 그 자연이 어떻게 도시의 소비생활 패턴과 관계를 맺을지에 대한 방법은 설정하지 못했다. 청계천과 리버워크의 가장 큰 차이는 청계천이 기존 도로와 떨어져 있어서 도시생활과 바로 연계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리버워크는 산책로와 곧바로 인접하여 문화 상업공간이 바로 연결되는 것이다.
샌안토니오는 향유하고 소비하는 도시문화의 대상으로서 강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이 도시가 가진 경쟁력의 가장 큰 자산이다.
샌안토니오=정현아 DIA건축연구소 대표
■ 개발의 중추 ‘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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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리버워크 개발 프로젝트는 2011년 완성을 목표로 진행 중이다. 약 5.8km의 도심구간(Downtown Reach)을 좀 더 자연친화적이면서 세련된 문화 상업시설이 들어서도록 한 1단계 개발은 이미 끝났다. SARA는 도심구간을 포함해 4개 영역으로 이루어진 총연장 약 21km의 리버워크 조성 계획을 세우고 있다.
도시 전체를 가로지르는 물길을 뚫어, 그 물길이 도시의 건축물들과 문화공간을 중계하는 허브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는 게 SARA의 구상이다.
이미 개발된 도심구간 위층으로는 박물관, 극장을 물길과 잇는 박물관 구간(Museum Reach)이, 아래층으로는 역사보존구간(Historical Reach)이 조성됐다.
‘전통과의 교감’을 목표로 하는 역사보존구간은 4개의 ‘미션 포털’로 구성된다. 샌안토니오에는 앨러모 성당 등 19세기 텍사스 독립을 위해 멕시코 군과 전투를 벌이는 데 기지역할을 했던 선교지가 5곳 있는데 이들은 모두 관광지로 조성돼 있다. 이 중 4개를 리버워크와 연결하면 관광 수익 증대에 시너지 효과가 날 수 있다고 샌안토니오 시는 판단하는 것.
SARA의 핵심 세부목표 중 또 다른 하나는 ‘생태계 복원’이다. SARA는 앞으로 정비될 강변에 가로수 2만4000그루와 56종의 풀을 심고, 113종의 해양식물, 320종의 초목식물 등을 방사할 계획을 갖고 있다.
리버워크 도심구간 건설에는 1300만 달러(약 136억 원)가 들었지만 향후 공사비는 그 10배가 넘는 1억6000만 달러(약 1680억 원)가 소요될 전망이다. 재원 확보에 문제는 없을까. SARA의 마크 소렌슨 주임 엔지니어는 “민간 자금을 적극 끌어들일 계획이라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SARA는 막대한 개발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산책길과 계단, 교각, 유람선은 물론 가로등, 비상용 전화부스, 쓰레기통 등 사소한 부대시설까지 민간 기금으로 마련하고 있다. 해당 시설에 기부자의 이름을 붙여주거나, 특정 구간을 유료화해 기부자가 입장료를 받을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이다. 산책로와 물길 사이의 조그만 공간을 확보해 폭포가 떨어지게 하고, 그 폭포 사이로 걸을 수 있도록 만들 ‘그로토(Grotto)’의 경우 유료화 계획을 이미 마련해 놓고 있다.
샌안토니오=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 리버워크 문화친화형 경관 5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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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안토니오 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샌안토니오 강은 총연장 384km의 긴 강이다. 이 중 시의 도심구간을 흐르는 5.8km가량의 물줄기를 따라 리버워크라는 산책로가 조성됐다. 도심구간의 물줄기는 샌안토니오 강의 지류천(支流川)인 샌안토니오 스프링, 샌페드로 스프링에서 끌어왔다. 복원된 청계천의 운영 시스템과 거의 같은 것이다. 청계천과 비슷해 보이지만 차별화되는 리버워크의 풍경 5가지를 꼽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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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안토니오=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참여 전문가>
○서현(43·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서울대 건축학과, 대학원 졸
미국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 석사
저서 ‘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등
○이종호(49·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한양대 졸
예술종합학교 sa도시건축연구소장
대표작 박수근미술관 등
○이영범(43·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서울대 건축학과, 대학원 졸
영국 AA스쿨 박사
‘도시연대’ 커뮤니티 디자인센터장
○정현아(36·DIA건축연구소) 대표
홍익대, 대학원 졸
미국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 석사
[도시, 미래로 미래로]<3> 美 뉴멕시코주 샌타페이
![]() 샌타페이의 심벌인 어도비 양식의 건축물들. 모서리가 둥근 갈색 건물들은 새파란 하늘, 그 속에 간간이 스쳐 지나가는 흰구름과 한가롭게 조화를 이룬다. 샌타페이=조인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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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의 심벌이 된 인디언 건축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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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타페이를 개성 있게 만드는 첫 번째는 ‘어도비 양식’으로 불리는 특유의 진흙 건축물이다. 건조한 날씨와 높은 고도 때문에 나무가 많이 자라지 않아 집을 진흙과 짚으로 짓는 이 전통적인 방법은 점차 도시의 독특한 개성이 되었다. 시 당국은 독특한 건축 양식이 도시의 가치를 높일 수 있다고 판단해 1950년대부터는 신축 건물들도 어도비 양식으로만 짓도록 규제하기 시작했다. 건물 높이를 최고 3층으로 묶었고, 모서리는 둥글게, 색조는 주황부터 갈색, 외장은 진흙 등 아도비 양식을 유지하도록 구체적인 제한을 두었다. 건물을 신축할 때는 HRB(Historic Review Board)라 불리는 위원회의 까다로운 사전 심의를 거치도록 했다. 이로써 반세기가 흐른 지금, 어도비 양식의 건물은 샌타페이의 가장 독특하고 가치 있는 자산으로 남게 되었다.
근래 샌타페이 시는 현존하는 어도비 양식 건물과 조화되는 현대 건축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멕시코 출신 건축가로서 국제적 명성을 얻은 리카르도 레고레타가 설계한 고급 콘도미니엄 ‘조칼로(Zocalo)’는 그 한 예. 그는 심플한 기하학적 조형과 강렬한 색의 대조 등을 통해 어도비와의 현대적 중재를 시작했다.
○ 도시 콘텐츠의 중심은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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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 건축 양식에 대한 시의 강력한 규제는 자칫 도시를 과거에 묶어 두거나 도시의 거주성, 실제성은 떨어뜨린 채 이미지화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타페이의 이미지가 진정성을 갖는 이유는 건물이 단지 외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담는 콘텐츠와 어우러지기 때문이다.
예술은 샌타페이라는 도시 콘텐츠의 중심에 있다. 샌타페이 시민 여섯 명 중 한 명은 예술산업에 종사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예술가가 이곳을 둥지로 삼았고, 지금도 다운타운의 캐니언로드를 중심으로 1000여 명의 예술가가 모여 산다.
그중에서도 조지아 오키프(1887∼1986)는 단연 샌타페이를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위스콘신 출신으로 뉴욕 등에서 활동했던 오키프는 1946년 뉴멕시코로 삶터를 옮겼다. 이후 사막과 하늘이 잇닿은 독특한 자연 풍경의 추상화, 사막 한가운데에서의 은둔 생활 등 그녀의 작품과 삶 모두에서 샌타페이의 독특한 지역성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샌타페이 시가 자랑으로 삼는 오키프미술관은 이 도시가 자산으로 삼는 역사와 예술을 어떻게 보존에 머물지 않고 현재형으로 계속 재생산해 내는지를 잘 보여 준다. 2005년 하반기 오키프미술관의 전시는 앤디 워홀의 꽃과 오키프의 꽃을 함께 수평으로 내건 것이었다. 오키프미술관 부설 리서치센터는 그녀를 과거의 작가로 잠재우지 않고 끊임없이 현대적 문맥으로 끌어내 의미를 확장하고 재설정해 낸다.
샌타페이=정현아 DIA건축연구소 대표
샌타페이, 문화 - 휴양이 흐르는 ‘오아시스’
![]() 샌타페이 중심가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테레사 머리 오고먼 사장은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같은 대도시가 싫은 미국의 ‘예술 애호가’들은 대부분 이곳을 찾는다”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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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스페인 양식이 가미된 멕시코, 볼리비아산 미술품들을 주로 취급하는 샌타페이 다운타운의 페이턴 라이트 갤러리도 발에 차일 만큼 많은 갤러리 중 하나다. 6만 달러짜리 부엌의자부터 200만 달러짜리 그림까지 갖춘 이 갤러리는 도대체 수지를 어떻게 맞출까. 이 갤러리의 테레사 머리 오고먼 사장은 “단골들이 미국 전역에서 찾아온다”고 말했다.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처럼 번잡한 도시에서 예술을 느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샌타페이를 대안으로 생각한다고 볼 수 있어요. 대개는 샌타페이에 마련해 놓은 세컨드 하우스에 장기간 머물면서 충분히 시간을 갖고 쇼핑을 하죠.”
샌타페이 시는 뉴욕이나 보스턴, 로스앤젤레스 등에 살고 있는 부유한 예술애호가들을 세수(稅收)를 창출하는 새로운 시민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매력적인 유인 요소는 샌타페이 외곽에 새로 건설되는 고급 콘도미니엄. 이 중 리카르도 레고레타가 설계한 콘도미니엄 ‘조칼로’는 최근 이곳에 휴양용 별장을 마련하려는 예술 애호가들 사이에 단연 화제다.
명칭은 ‘콘도미니엄’이지만 우리로 따지면 경기 성남시 분당구나 용인시 택지지구에서 볼 수 있는 고급 단독주택 단지에 가깝다. 최근 4년 새 46채를 순차 분양했는데 산이나 사막 조망권이 보장되는 측면 쪽은 모두 초기에 다 팔리고 현재는 8채 정도가 남아 있다. 28∼40평형인 이 콘도의 집값은 평균 38만5000달러로 한국 돈으로 4억 원이 채 안된다. 샌디에이고에 살면서 최근 이 콘도를 별장용으로 샀다는 로빈 매들락 씨는 “투자 목적도 있지만 사막의 태양빛, 낮이면 지평선을 볼 수 있는 드넓은 시야 등 샌타페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예술적 영감, 예술과 접목된 휴양의 세계가 나를 이곳으로 오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샌타페이=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4> 프랑스 릴
![]() 영국 런던과 벨기에 브뤼셀의 시민까지 쇼핑을 하러 오게 만드는 프랑스 릴의 고급 쇼핑 공간 유라릴. 릴 유럽 역과 릴 플랑드르 역 사이의 버려진 땅에 세워진 이 대규모 쇼핑문화공간은 릴을 기차 타고 지나가는 도시가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목적지로 만들었다. 릴=이진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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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는 작지만 도시로서 릴의 이력은 녹록지 않다. ‘플랜더스의 개’로 널리 알려진 플랑드르의 중심지가 바로 릴이다. 세계 최초로 무인 전차를 놓은 도시이며 프랑스에서 루브르 다음 규모의 박물관을 갖춘 도시이기도 하다. 과거 릴에 부를 가져왔던 것은 석탄과 철강업이었다. 그러나 21세기 릴의 혈맥은 철도다. 1994년 개장한 복합공간 유라릴은 릴에 피가 제대로 돌게 하는 심장과 같은 존재다.
○ 철도가 가져다준 도약의 기회
릴에는 두 개의 거대한 역이 있다. 옛 역인 릴 플랑드르와 새 역인 릴 유럽. 유라릴은 이 두 개의 역 사이에 있던 1만5000여 평의 황무지에 새롭게 세워진 복합공간이다. 상가, 아파트, 사무실, 학교가 망라된 이 복합공간은 한때 프랑스 최고의 실업률로 고민하던 릴에 5000개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 주었다. 자본금의 100배에 이르는 투자가 유치됐다. 유라릴의 성공에 힘입어 현재는 유라릴 인근의 터를 흡수해 3만 평 규모의 추가 공간을 짓는 2단계 공사가 진행 중이다.
릴의 주 산업이었던 광업은 1970년대 들어 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직물산업도 버티기 힘들었다. 저임금을 기반으로 필사적으로 덤벼드는 한국 같은 후발 경쟁국들의 도전에 버텨 낼 수가 없었다.
릴의 공장들은 저임금의 외국인 노동자 고용을 생존 대안으로 선택했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들의 거주지가 도시에 형성되면서 주민들 간에 갈등이 부풀어 갔다. 릴은 막다른 골목으로 밀려갔다.
1973년 취임한 피에르 모로아 시장은 도시를 살릴 돌파구를 마련해야 했다.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28년을 재임한 그가 찾은 답은 ‘철도’였다. 릴은 프랑스 벨기에 영국을 연결하는 삼각형의 한가운데 있었다. ‘삼국을 연결하는 허브 역이 된다’는 도시 발전 전략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테제베(TGV)노선 계획은 이미 릴보다 더 서쪽의 도시 아미앵을 거쳐 해저터널로 영국과 연결되는 것으로 수립돼 있었다. 게다가 터널의 위치 선정은 영국이 동의해야 하는 국제적인 계획이었다. 결국 릴을 통과하는 노선이라야 더 많은 국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안에 영국이 설득됐다. “당시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우리의 구세주였다”고 릴 시의 공보관은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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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승지에서 목적지로
기회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만들어 냈다. 새 노선이 마련되자 기존의 릴 플랑드르 역을 옆에 두고 새 역을 건설해야 했다. 두 역 사이 1만5000여 평의 빈 땅이 자칫하면 흉물로 남을 위기였다. 이때 유라릴메트로폴(Euralille-Metropole)이라는 민관(民官) 합자 개발회사가 설립됐다. 유라릴메트로폴은 8명의 건축가를 초대했다. 그들에게 개발 회사가 요구한 것은 구체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이 도시에 대한 철학과 비전이었다. 네덜란드의 건축가 램 콜하스가 총괄 책임건축가로 선정됐다.
‘유라릴’은 철도역이 아니라 도시 릴을 위한 계획이었다. 이 초대형 상가를 살리겠다고 기존 도심의 상권을 황폐화시킬 수는 없었다. 유라릴 상가에 입주하려는 사업자에게는 기존 도시의 상가를 철수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다.
유라릴메트로폴은 건물의 크기뿐 아니라 건물의 질적인 수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다. 시민 공무원 언론인 심지어 철학자도 포함된 위원회가 매월 모여 건축가를 선정한 뒤 건물의 질적인 문제를 검토하고 전략을 만들어 나갔다.
릴은 점차 환승지가 아닌 목적지로 탈바꿈해 나갔다. 역 인근에 대형 문화공간 그랑팔레가 완성됐다. 그랑팔레의 전시장 세 홀에는 각각 파리홀, 브뤼셀홀, 런던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차역에 도착한 사람들은 화려하고 우아한 유라릴의 상가를 걸어 다니다 자연스럽게 도시 내부의 문화공간으로 흘러들었다.
릴은 제노바와 함께 2004년 유럽문화도시로 지정됐다. 유럽연합(EU)의 기금으로 릴은 저소득층이 모여 사는 도시 남쪽에 새로운 문화시설 메종폴리를 세웠다. 폐허였던 맥주공장 직물공장이 주민들을 위한 음악회 전시회가 열리는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철도가 생기를 불어넣은 도시 릴은 이제 시민의 참여로 명실상부한 문화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릴은 프랑스에서 지방세율이 가장 높은 시로 꼽힌다. 후임 시장에게 자리를 넘긴 불도저 시장은 말한다. “나는 시를 바꾸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나는 마술사가 아니다. 변화는 투자를 필요로 한다.”
릴=서현 교수·한양대 건축학부
[도시, 미래로 미래로]릴에 가면 通한다
![]() 영국 런던에서 벨기에 브뤼셀까지 2시간 20분에 주파하는 대륙 간 고속철 유로스타. 1994년 개통 이후 런던과 파리를 오가는 승객이 두 배로 늘었으며 유로스타의 허브인 릴도 더불어 융성기를 맞게 됐다. 릴=이진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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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1일 저녁 영국 런던에서 프랑스 릴을 거쳐 벨기에까지 달리는 유로스타(Eurostar) 객차 안. 일본인 사업가 사가미(42) 씨는 “릴에서 하룻밤 묵은 후 내일 아침 바로 파리로 가야 한다”며 “프랑스 동북부,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를 오가면서 사업을 하는데 릴은 도착과 출발이 이뤄지는 근거지”라고 말했다.
프랑스 동북부 노르파드칼레 주에 위치한 릴은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서부 지역까지 아우르는 철도 교통의 요지. 영국과 벨기에, 네덜란드 등에서 오는 승객들은 릴을 거쳐 프랑스 전역으로 흩어진다. 릴에서 런던까지는 1시간 40분, 파리까지는 1시간, 브뤼셀 38분, 암스테르담이 2시간 거리다. 유로스타, 테제베(TGV) 등 매일 릴에 정차하는 기차는 100여 편에 이른다.
1994년 도버 해협에 터널이 뚫리고 프랑스의 TGV 등 고속전철로 영국과 프랑스를 연결하는 국제선 유로스타가 개통된 이래 릴은 유럽의 교통 허브로 새로운 융성기를 맞고 있다.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 워털루 역을 떠나 릴 유럽 역을 거쳐 벨기에 브뤼셀의 미디 역에 닿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2시간 20분. 유로스타 개통 이후 런던과 파리 주행시간은 2시간 35분이다. 2007년이면 이마저도 20분이 단축된다. 프랑스나 벨기에만큼 고속으로 철도를 움직일 수 없었던 영국 구간의 철도 공사가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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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스타는 환승이 편리하고 운행시간이 짧아 사업 여행이 목적인 유럽인들이 주로 이용한다. 하지만 예약을 하지 않으면 릴∼런던 편도(영국 애슈퍼드 역에서 1회 정차)의 경우 성인(25세 이상)은 160유로(약 19만 원·1주일 전 예약 시 70유로)나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출장을 갈 경우 비행기 이용자가 더 많다. 그렇지 않아도 유로스타에 손님을 빼앗긴 항공사들은 철도회사가 따를 수 없는 저렴한 운임을 제시하며 가격 경쟁을 펼쳐왔다. 버진항공 등은 한때 철도 운임의 10분의 1 가격으로 동일 구간의 항공료를 정하기도 했던 것.
그러나 릴은 지상에 승객들이 쉬어갈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고 대규모 쇼핑몰을 세움으로써 항공사들의 가격 공세를 돌파했다.
릴=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5>이탈리아 볼로냐
![]() 지붕이 있는 보행로인 ‘포르티코’는 볼로냐 시 특유의 건축구조다. 도심을 둘러싸고 40여 km 가까이 조성된 포르티코는 햇빛을 가려 주고 눈비를 막아 준다. 사진 제공 이영범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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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주요 도시가 으레 도심 뒷골목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과 달리 볼로냐 도심 뒷골목은 이처럼 개성 있는 공방들 덕분에 활력이 넘쳐난다. 인구 42만 명의 볼로냐 시는 중소 규모 공방들이 세계 수준의 명품을 생산하면서 이탈리아 제2의 부자 도시로 발돋움했다. 세계 최초의 대학인 볼로냐대가 있는 역사도시로만 알려졌던 볼로냐가 어떻게 생산력이 왕성한 ‘21세기형 창조 도시’로 탈바꿈할 수 있었을까.
○ 공동화된 도심을 문화 창조 공간으로
볼로냐에는 1970년대부터 도시 외벽(옛 성곽) 밖으로 펼쳐진 주거지와 주변 농촌의 경계지점에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패키지(자동포장) 기계제조 기업 등이 들어섰다. 그러나 교외지역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역사적 건축물이 몰려 있는 도심은 공동화되기 시작했다. 시는 ‘역사적 시가지 보존과 재생’이라는, 소위 ‘볼로냐 방식’의 도심 재생전략을 짰다. 1985년부터 도심을 6구역으로 나눠 역사적 건축물의 보존과 복원, 활용방안을 세밀하게 수립한 것.
시청 앞 마조레 광장에서 ‘두 개의 탑’과 볼로냐대로 이어지는 축을 따라 뒷골목 구석구석에서 생겨난 예술공방형 기업들은 도심 재생의 가장 큰 힘이 됐다. 특히 볼로냐가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추진한 ‘볼로냐 2000 프로젝트’는 도심 건축물의 외관은 보존하되 내부는 첨단 문화공간으로 바꾸었다. 옛 주식거래소는 이탈리아 최대의 디지털 도서관으로 변신했고, ‘팔라초 디 렌초’ 등 중세 귀족들의 저택은 대규모 이벤트와 회의를 열 수 있는 시설로 복원됐다. 이 같은 노력으로 볼로냐는 국제아동도서전, 체르사이에(타일 인테리어 국제전시회) 등 세계적인 컨벤션과 이벤트를 개최하는 박람회 도시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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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규모 공방을 키워라
작지만 강한 공방형 중소기업을 거미줄처럼 엮는 ‘문화 창조도시’ 전략은 볼로냐만의 세계적인 명품을 낳았다. 공기주머니를 밑창에 넣어 발가락과 그 주위 부분이 신발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볼로냐 공법’으로 만들어진 수제 구두 ‘테스토니’와 ‘브루노 말리’ 등은 그 대표 격이다.
작은 공방형 기업들은 CNA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해 전 세계를 상대로 공동 기획, 홍보, 마케팅을 펼치며 사업을 확장해 나간다. 1945년 창설된 볼로냐 시의 CNA에는 현재 2만1000여 명의 기능인이 가입해 있다.
CNA 산하 예술기능인직업학교(ECIPAR)의 매니저 루카 로베르시(42) 씨는 “공방형 기업의 정착이 가능하도록 시가 도심 재생전략을 짜고 공동 마케팅, 금융, 박람회 전시 지원 등을 해 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볼로냐=이영범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볼로냐에 가면 마냥 걷고 싶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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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볼로냐 도심에 있는 모든 건물의 1층마다 처마가 보도까지 뻗어 나가 전 시가지를 회랑처럼 구석구석 연결해 주기 때문이다. 아치형의 이 독특한 회랑은 ‘포르티코(portico·주랑·柱廊)’라고 불린다. 투영되는 빛과 그림자를 통해 건물의 미학적 깊이까지 더해 주는 포르티코는 로마 피렌체 밀라노 등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볼로냐만의 도시 명품이다.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것은 시민들이 합의하에 포르티코를 완벽하게 보존하는 도시 계획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도심 전 구역에 조성된 포르티코는 오래된 건축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도심에 새로 건물을 지을 경우 건물 사유지의 일부를 개조해서라도 포르티코를 만드는 것을 의무화했다. 이 때문에 볼로냐의 포르티코는 건물마다 그것이 생겨난 시대의 유행을 반영해 각각 모양이 다르다. 꾸밈없이 소박한 중세풍, 섬세한 고딕풍, 화려한 르네상스 양식, 중후한 바로크풍, 단순한 모양으로 지어진 시멘트 아케이드까지…. 포르티코는 역사 속에 담긴 도시의 발자취를 하나의 길로 연결하는 동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볼로냐를 찾았을 때 거리의 상가는 신년 세일 중이었다. 쇼윈도마다 ‘SALDI’(‘세일’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라는 안내문이 붙은 상가에는 쇼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탈리아 디자인 명품이 진열된 쇼핑몰은 이 포르티코 지붕 아래서 행인들을 맞았다. 건축물인지 보도인지 구분이 안가는 포르티코 아래에서는 보행자와 건물이 서로 따스하게 소통한다. 포르티코 주변에는 문을 활짝 열어 놓고 피자를 구워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한여름에는 포르티코 그늘 아래 펼쳐진 야외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한가로이 차와 와인을 마신다.
볼로냐에서 음대를 졸업한 한국인 유학생 황 루디아 씨는 “예술적으로도 빼어나고, 기능적으로도 편리한 포르티코 덕분에 볼로냐는 시민들의 감성이 살아 숨쉬는 도시로 느껴진다”고 말했다.
볼로냐=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6>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
![]()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여유로운 도심. 시 당국은 “많은 시민이 도심을 걸어다닐수록 도심의 안전도가 높아진다”는 판단에 따라 도심에 시민의 발걸음을 유인할 작은 상점, 노점상들을 유치하기 위한 축제를 기획한다. 사진 서현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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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장을 없애 안전을 지키다
크라이스트처치는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의 ‘어린이에게 친근한 도시(Child Friendly City)’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한 도시 중 하나다. 어린이들에 대한 관심은 1989년 비키 벅 씨가 뉴질랜드 최초의 여성시장에 당선되면서 시작됐다.
벅 시장은 어린이들이 느끼는 안전문제를 파악하기 위해 ‘어린이 대표’ 제도를 운영하고 어린이 중심 도시를 만들기 위해 방대한 조사를 시행했다. 현 시장에까지 이어지는 ‘평화로운 도시(Peace City)’ 사업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도시에서의 안전은 크게 범죄 위협을 막아 주는 치안(security), 교통사고를 포함한 물리적 위협으로부터의 안전(safety)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크라이스트처치 시와 시민들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 포함시킨다. 실제의 위험보다 더 시민을 위협하는 것은 ‘도시가 위험하다’는 인식이라는 것이다.
안전한 도시 조성의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이 시민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다. 시 정부가 앞장서고 시민들이 떠밀려 다니며 불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구도가 크라이스트처치에 형성되어 있다.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어디까지가 시 정부고 어디부터가 민간단체인지가 모호할 정도로 많은 시민의 모임이 엮여 있고 이들의 적극적인 역할이 도시를 지탱한다.
‘90계획’도 이런 맥락에서 추진된다. 모든 시민이 범죄를 예방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크라이스트처치 시민들은 담장을 높이 쌓는 것이 아니라 담장을 없애는 것이 범죄를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가로등도 차도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인도의 구석까지 비출 수 있도록 별도로 마련됐다. 도시 구석구석에서 이웃의 시선으로부터 감춰질 수 있는 곳을 없애는 것이 안전한 도시를 만드는 길이라고 크라이스트처치 시민들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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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학생 90% 이상이 아시아계
도심의 안전을 지키는 방안에 대해서도 크라이스트처치가 내놓은 원칙은 같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크라이스트처치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90%를 넘지만 야간에 도심이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30%를 넘지 않았다.
시가 내놓은 방안은 도심 활성화였다. 항상 많은 사람이 도심에서 돌아다녀야 범죄가 예방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심에는 소매점이 있어야 하고 심지어 노점도 범죄 예방에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시 당국은 세금 감면의 유인책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 시는 자본력이 약한 소매상을 위해 공동광고를 해 주고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다양한 축제를 기획한다.
안전한 도시에 대한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노력은 의외의 보상을 가져왔다. 아시아의 청소년 유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20여 분만 걸으면 도심의 끝에서 끝까지 갈 수 있는 크라이스트처치에서는 서울의 광화문에서 시청 정도의 거리를 걷는 동안 중국 한국 일본 음식점을 각각 서너 곳은 마주치게 된다.
이들 상점의 주요 고객은 청소년 유학생들. 영어를 사용하는 도시이면서 자연환경이 뛰어나 안전한 도시라는 장점이 청소년들을 혼자 유학 보내는 아시아 부모들의 마음을 끌어당긴 것이다.
인구 30만 명인 크라이스트처치에 2003년 외국인 유학생은 1만5000여 명이었다. 그중 1만4000여 명이 중국 일본 한국에서 온 학생이었다. 이들이 크라이스트처치에 뿌린 돈은 1억5000만 달러에 이른다.
크라이스트처치는 2025년까지 유학생이 현재의 4배로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국제협력실장인 수 맥팔레인 씨는 “외국 유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안전한 도시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시민에게 안전한 도시’다. 경제적인 보상은 그 결과일 뿐이다.
크라이스트처치=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 공원內범죄, 꿈도 꾸지 마세요
‘안전한 도시’를 추구하는 크라이스트처치 시의 노력이 얼마나 세심한지는 공원 한 곳만 들러도 느낄 수 있다. 휴식, 산책, 조경 등의 공간으로만 생각하던 공원의 의미를 ‘범죄 예방의 장소’로 확대한 것.
시 중심에서 약간 서북쪽에 있는 해글리 공원은 면적 55만여 평의 방대한 규모. 수풀이 울창하지만 밤에도 안심하고 어느 곳이든 다닐 수 있다.
공원은 전체적으로 중앙에 대형 잔디밭이 있고 그 주변을 따라 나무가 심긴 형태.
나무는 대부분 성인 남자의 눈높이보다 높은 곳부터 가지가 뻗어 있다. 나무 때문에 시야가 가리는 것을 막기 위해 가지치기를 한 것이다. 수풀이 우거진 곳을 따라 산책로를 낼 경우 산책로와 수풀 사이에 시내를 만들어 차단막을 형성했다. 수풀에서 갑작스레 치한 등이 튀어나오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다. 산책로를 따라 배치된 의자도 얼굴이 길 쪽을 향하게 앉을 수 있도록 했으며 주로 공원 전체와 주변 경관이 훤히 보이는 방향으로 설치됐다. 인적이 드문 소로(小路)는 가급적 만들지 않고 주 산책로와 몇 개의 간선 산책로(escape routes)가 연결되는 형태로 이뤄졌다.
크라이스트처치 시는 도시 설계를 통해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 ‘환경 디자인을 통한 범죄예방(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al Design)’의 원칙을 마련해 놓고 있다. 시청 도시 디자인팀의 해나 레스웨이트 씨는 “공원 내 시설물의 위치, 시야 확보, 산책로 조성에 조금만 신경을 써도 공원 내에서 일어나는 범죄가 상당히 줄어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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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이스트처치=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7>日구마모토현 아트폴리스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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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의 이미지를 바꾼 67개의 건축 프로젝트
한때 미나마타병이라는 환경 재앙이 이곳에 있었다. 현의 미나마타 만 어민들을 덮친 이 공해병으로 인해 구마모토의 이미지는 무참하게 추락했다. 재기를 위해서는 새로운 이미지, 새로운 산업이 필요했다. 1980년대 구마모토 앞에는 ‘테크노폴리스’와 ‘아트폴리스’라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양자는 서로 관계가 깊었다. 테크노폴리스 정책으로 소니, NEC 등의 새로운 산업을 구마모토에 유치하려면 지역에 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를 걷어내며 사람과 기업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매력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아트폴리스 정책이었다.
두 정책의 중심에는 훗날 일본 총리가 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당시 지사가 있었다. 1983년 구마모토 현의 지사가 된 그의 행보는 신속했다. “남는 것은 문화밖에 없다”는 말을 남긴 그는 1984년 ‘활력, 개성, 윤기가 가득한 전원문화권의 창조’를 슬로건으로 한 ‘구마모토, 내일의 시나리오’를 내놓았다. ‘문화진흥 기본조례’를 제정하고 ‘공익신탁 구마모토21’이라는 이름의 문화기금을 조성했다. 그 클라이맥스에 1988년 아트폴리스 사업이 만들어졌다.
기왕 진행될 공공과 민간의 건축사업들이 당국에 신청되면 심사를 거쳐 아트폴리스 사업으로 지정됐다. 초대 커미셔너인 이소자키 아라타(磯崎新) 씨는 발주자들과 건축가, 때로는 사용자인 시민들 사이에서 충분한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1988년 이후 현의 이 도시, 저 도시에서 74개의 프로젝트가 진행되었고 67개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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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트폴리스의 핵심은 거버넌스
파리의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렌초 피아노는 현의 작은 섬마을 우시부카(牛深)를 위해 아름다운 하이야 대교(大橋)를 설계했다. 투명방풍스크린이 보행로 옆에 설치돼 바람을 맞지 않으면서도 바다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이 883m 길이의 다리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우시부카의 시장 니시무라 다케노리(西村武典) 씨는 “아트폴리스의 경험을 통해 경관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것을 마을 부흥에 적극 활용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세이와(청和) 마을의 분라쿠 극장도 성공 사례로 꼽힌다. 구마모토 시의 신치(新地), 오비야마(帶山) 등의 잘 짜인 주거단지는 삶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인근의 환경을 자극하고 변화시킨다. 점들이 선이 되고 선들은 면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아트폴리스 사업은 지역의 문화적 활기도 자극한다. 구마모토 시내 가와라(河原) 정의 낡은 시장. 그 틈새에 혈기로 가득 찬 문화 게릴라들이 모여들었다. 작은 주택 설계로 아트폴리스 추진상을 수상한 구마모토의 젊은 건축가 나가노 세이지(長野聖二) 씨는 4평도 안 되는 혼자만의 사무실에서 모델을 만지며 말한다. “수준 높은 결과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는 것은 무척 좋은 자극이다. 구마모토 전체의 수준도 차차 올라갈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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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인들만 즐겨 찾던 구마모토는 이제 국제적인 관심 속에 놓여 있다. 4년마다 국제 건축전이 열리고 해마다 방문객들이 늘어난다. 공식 방문객 중 90%가 한국의 건축인들, 공무원들이다. 무엇을 보고 돌아가는지, 과정보다 결과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닌지. 기실 아트폴리스 사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통치 아닌 협치(協治) 즉, 거버넌스의 과정이다. 사업의 담당자 구와하라 신코(采原眞幸)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느 지사가 새로 부임을 해도 아트폴리스의 정책과 정신은 계속 유지되어 왔다.” 당연하다. 아주 적은 투자로 이만큼의 성공적인 효과를 안팎으로 만들어 내는 사업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관계자 모두가 사업의 주체가 되어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과정을 중요시한다는 강한 합의를 전제로 한다. 구마모토=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사진 제공 구마모토 현
시골에 들어선 전통인형극장 세이와마을 “부자됐습니다”
![]() 세이와 분라쿠 공연에 등장하는 인형의 얼굴들. 구마모토=박정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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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주민 200여 명이 농사를 지으며 살던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1990년 4월 주민들은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던 전통 인형극 ‘분라쿠’를 활용해 아트폴리스 프로젝트 참여를 신청했다.
구마모토 현의 추천을 받은 건축가 이시이 가즈히로(石井和紘) 씨는 ‘자연미를 살려 달라’는 주민들의 의견을 감안해 에도시대 말기의 목조 건축 양식으로 극장을 완성했다. 얼핏 보면 빽빽한 나무 숲 속에 자리 잡은 움막 같지만 내부는 300명의 관람객이 동시에 인형극을 즐길 수 있도록 첨단시설을 갖춰 놓았다.
분라쿠는 공연자들이 검은 망토와 가면으로 몸과 얼굴을 가리고 뒤에서 줄을 이용해 인형을 움직이는 이 마을의 전통 인형극이다. 배우들은 일본 전통악기 샤미센(三味線)의 반주에 맞춰 특수한 억양과 가락으로 노래하고 말한다. 이 공연은 농사일을 하지 않는 마을 노인 17명이 맡고 있다.
극장 옆 물산관에서는 공연 중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을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이 극장 관계자는 “도시락은 마을 주부들이 고장의 명물인 술 넣은 밥과 산채 절임, 튀김 등으로 직접 만든다”고 설명했다.
인형극이 명성을 얻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세이와 마을은 한 해 평균 15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됐다. 이 마을은 인형극 공연 등으로 한 해 약 2억 엔(약 18억 원)의 수입을 올리고 있다. 주민 나카시마 모토요시(55) 씨는 “늘어난 수입보다 우리 마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에 더 만족한다”고 말했다.
와타나베 히사시(渡邊久) 극장장은 “극장이 생기면서 마을 주민들이 새로운 꿈과 희망을 갖게 됐다”며 “은퇴한 노인들이 문화 공연의 주체가 돼 새 삶을 살고 있어 다른 지역에서도 우리 마을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구마모토=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8>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 해안선을 바꾸는 인공섬… “세계 8대 불가사의” 두바이는 사막과 바다라는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자연조건을 오히려 장점으로 살려 최고급 리조트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인공섬 팜 주메이라 인근에 세계 최고 수준의 인테리어를 갖춘 주메이라 비치 호텔(오른편 돛 모양)의 앞쪽에는 고객 전용 요트장과 개인 비치가 있다. 버즈 알 아랍 호텔 27층에서 내려다본 두바이 전경. 두바이=조인직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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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모래바람 한가운데서 신기루가 현실이 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토후국인 두바이의 수도 두바이 시가 세계 최고, 세계 최대의 엄청난 개발 현장으로 변모한 것이다. 두바이 시는 중동 지역에서 부동산, 금융, 무역, 관광, 레저, 쇼핑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화려한 등장 뒤에는 석유 고갈 이후 이 도시의 생존을 앞서 준비한 왕, 셰이흐 모하메드가 있다. 그가 왕세자 시절 자신의 싱크탱크와 함께 계획한 두바이 미래 마스터플랜 ‘비전 2010’과 ‘비전 2020’이 오늘날 두바이 붐의 촉진제가 됐다.
두 마스터플랜은 두바이 경제구조를 석유산업 대신 관광과 무역으로 다각화하려는 것이었다. 다년간에 걸친 전략적 개발사업 덕분에 국내총생산(GDP)의 석유 의존도는 이미 6%대로 떨어졌다. 1990년대 말 ‘비전 2010’이 발표될 당시 터무니없어 보였던 ‘2010년까지 연 관광객 수 1500만 명 달성’이라는 목표 역시 현실이 되었다.
○ 지도를 바꾸는 간척사업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한 리조트시설과 주거단지 개발은 두바이 발전계획의 핵이다. 두바이 시와 잇닿은 페르시아 만에 땅을 새로 만드는 이 사업은 ‘세계 8대 불가사의’로 불린다. 2001년부터 시작된 ‘팜 주메이라’와 ‘팜 제벨 알리’, 그리고 ‘더 월드’는 한창 건설 중이고, 이들이 채 완공되기도 전에 연이어 ‘팜 데이라’과 ‘워터프런트’ 계획이 발표됐다.
간척으로 만들어지는 인공섬 ‘팜아일랜드’는 두바이의 해안선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있다. 규모도 규모지만 디자인의 직설적인 과감함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바다 위에 52.5km²에 이르는 커다란 야자수 잎이 드러누운 형상의 인공섬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300개 섬을 모아 놓은 형상인 45km²의 ‘더 월드’는 세계 지도 모양으로 각 섬이 각국 영토를 상징한다. ‘팜아일랜드’와 ‘더 월드’는 모두 개인에게 분양 중이다.
2004년 공사가 시작된 ‘두바이랜드’는 사막 가운데 테마파크와 스포츠시설, 자동차 경주를 즐길 수 있는 레저, 휴양 시설을 조성하는 것이다. 쇼핑센터와 함께 중동 최초의 실내스키장이 지어진 ‘에미리트 몰’은 스키장 개장 후 성황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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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 개발사업은 정부와 민간개발업체 간의 밀접한 협력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나힐(Nakheel)과 에마르(Emmar), 두바이홀딩스(Dubai Holdings)로 대표되는 3개의 개발업체는 국유지를 무상으로 지원받아 개발한다. 팜아일랜드 등의 인공섬 개발을 진행하고 있는 나힐 사의 제임스 윌슨 사장은 “개발사업에 외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두바이의 법령을 국제적 기준에 맞게 바꾸어 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새로운 도시의 건설은 법 이외 무형의 영역에서도 진행된다. 항구에는 관세가 면제되는 자유무역지구가 있어 두바이를 다른 중동지역과 아프리카로 드나드는 관문도시로 만들고 있다. 1998년 에마르 사가 확장한 두바이 국제공항에서는 국적항공사인 아랍에미리트 항공의 비행기들이 두바이를 전 세계와 직항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여기에 9·11테러 이후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이 대거 유입됐고,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과 외국인 거주자의 비율도 급증했다. 이제 두바이 시는 어디서든 영어가 통하고, 달러가 아랍에미리트 기축통화인 디르함과 동등하게 거래되는 코즈모폴리턴 도시가 되었다.
최고급을 지향하는 리조트시설, 사막 최고 최대 규모의 마천루 건설, 불가능할 것 같은 간척사업의 실현, 쇼핑축제 등의 이벤트 개최, 해외투자자를 위한 거리낌 없는 정책…. 이 모든 것은 수요가 낳은 건설이 아니라, 개발이 거꾸로 수요를 만들어내는 두바이식 도시개발 모델의 한 부분이다.
물론 과도한 성장과 지나친 도시 확장으로 실제 거주자들이 겪는 인플레이션과 생태계 교란 등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두바이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살아 움직이는 도시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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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바이=정현아 DIA건축연구소 대표
▼명품 호텔-별장 세계부호들 유혹▼
두바이가 비즈니스 요충지를 넘어서 동남아시아와 유럽의 휴양지 못지않은 ‘리조트 도시’로 부상하기까지는 몇 개의 ‘명품 호텔’들이 선도적 역할을 했다. 최근에는 이 역할을 바다가 보이는 주상복합아파트 등 ‘리조트 부동산’들이 이어받아 전 세계 부호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개장 6년밖에 안 됐지만 전 세계적으로 ‘7성(星)호텔’이라는 별칭으로 통하는 ‘버즈 알 아랍’ 호텔이다. 객실 202개가 모두 2층 복층형의 스위트룸이며 페르시아산 카펫, 모로코 귀금속으로 만든 샹들리에 등 초호화판 인테리어로 꾸며졌다. 객실 면적도 모두 50평 이상이다. 뤽 델라포즈 총지배인은 “스페인의 ‘휴양 리조트’에 지루해진 부유한 유럽 관광객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 것이 이 호텔이 단기간에 명성을 얻게 된 주 요인”이라고 말했다.
해변을 끼고 있는 총면적 11만6000평의 마디나 주메이라 비치 리조트는 호텔과 빌라, 개인 별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쇼핑, 여흥, 숙박을 모두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했으며 바닷물을 끌어들여 물길을 조성해 나룻배로 이동하도록 했다. 두 호텔의 최고 객실이나 빌라의 하룻밤 숙박료는 모두 8000달러(약 770만 원) 선이지만 평균 기온이 20도 안팎인 11월∼이듬해 2월의 성수기 예약은 늘 밀려 있다.
두바이에서는 2002년부터 외국인의 부동산 소유가 가능해져 상업용 부동산 이상으로 리조트형 부동산도 인기를 끌고 있다. 집을 사면 주거 비자가 나오고, 다른 세금 없이 거래가의 2%만 등록세로 내면 되는 것이 두바이 부동산 투자의 장점. 두바이 토지주택국에 따르면 2004년 6월부터 최근 1년 반 동안 두바이 전체 부동산 가격은 175%나 상승했으며, 2005년 총 부동산 거래액은 2003년에 비해 2.93배나 늘었다.
두바이 부동산 중개회사 ‘고웰시닷컴’의 피터 펜헬 대표는 “현재는 공급 과잉 상태라 단기 조정이 예상된다”며 “그래도 바닷가나 인공섬 근처에 분양되는 50층 이상 리조트형 주상복합아파트들은 분양가만 최소 300만 달러(약 30억 원)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식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두바이=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9>오스트리아 그라츠
![]() 외계우주선 닮은 쿤스트하우스 고풍스러운 건물들 위에 불시착한 우주선 같은 독특한 외관의 쿤스트하우스. 밤이면 청색 아크릴 외장재 안쪽에 설치된 700개의 형광등이 컴퓨터 시스템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패턴으로 점멸해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사진 제공 쿤스트하우스 그라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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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된 그라츠가 도시를 변화시키며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강동과 강서의 통합이었다. 도시의 동과 서가 서로 건널 수 없는 저편이 아니라 새로운 그라츠를 만드는 두 개의 수레바퀴일 수 있음을 깨달은 도시민들은 문화를 통해 도시의 갈라진 틈을 메우기를 절실히 원했다.
○ 친근한 외계인, 쿤스트하우스
문화를 통한 도시 개조와 계층 간의 사회적 통합을 위해 무어 강을 적극 이용하고 강 양편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빈곤층 밀집 지역인 무어 강 서쪽 지역이 예술로 도시를 재개발하기 위한 ‘아트존’으로 설정됐다. 그 중심에는 2004년 9월 5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건설된 쿤스트하우스가 있다.
영국의 건축가 피터 쿡과 콜린 푸르니에가 설계한 쿤스트하우스는 우주선처럼 보이는 4층짜리 유선형 건물. 문어의 빨판처럼 촉수를 내민 지붕의 창과 밤이면 화려한 섬광으로 번쩍이는 청색 아크릴 외장 때문에 건물 자체가 시각적 충격이다. 소장품 없이 다양한 현대미술의 실험장으로 자유롭게 운영되는 쿤스트하우스는 이처럼 고정관념을 탈피한 아방가르드 건축물이다.
그라츠에서 가장 높은 시계탑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쿤스트하우스는 중세풍의 빨간 지붕 사이로 검푸른 연체동물이 촉수를 내밀고 기어가는 듯한 형상이다. 시민들의 80%가 당초 새로운 미술관 건립 계획에 반대했지만 이제는 이 건물에 ‘친근한 외계인(A friendly alien)’이란 별칭을 붙여줄 정도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쿤스트하우스는 주변의 도시공간까지 문화적으로 바꾸었다. 큰 나무 그늘에 사람들이 모여들 듯 쿤스트하우스 주변에 재즈바, 영화관, 아틀리에, 콘서트홀, DVD감상실, 쇼핑센터 등 작은 공연장과 카페가 속속 들어섰다. 범죄율이 높아 밤이면 아예 강을 건너오지 않던 동쪽 구도심 지역 사람들도 서쪽을 찾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이제 밤마다 새로운 문화를 만끽하는 젊은이들로 북적댄다.
그라츠대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로베르트 브라틀러(29) 씨는 “원래 동쪽 역사지구에 살고 있었는데 문화적 매력 때문에 쿤스트하우스 근처로 집을 옮겼다”며 “사람들이 이제는 이곳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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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의 밝음과 어둠을 잇는 무어강의 인공섬
도심의 또 하나의 명물은 무어 강에 놓인 길이 46.6m의 보행교인 ‘문화의 다리’이다. 그라츠 출신 미술전문 기획자인 로버트 푼켄호퍼와 뉴욕 출신 건축가 비토 아콘치의 예술적 상상력은 이 다리를 통해 강 양편의 ‘충돌’을 ‘화합’으로 전환시키는 기적을 낳았다.
‘문화의 다리’ 중간에는 도시민 모두가 강에서 만나 즐길 수 있는 ‘인공섬’이 조성됐다. 강수량에 따라 배처럼 뜨고 가라앉도록 설계된 인공섬은 마치 강물의 소용돌이가 형상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양쪽에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인공섬에 들어서면 투명한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카페가 주민들을 맞는다. 흐르는 강물과 같은 눈높이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다른 한편에는 70평 남짓한 야외무대 공간이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이곳에서는 자그마한 재즈콘서트와 마임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려 도시민의 휴식공간이 된다.
인공섬 카페 직원 게르트 볼프(24) 씨는 “평일 저녁과 주말에는 주민들이 와서 와인을 즐기지만 독일 헝가리 체코 이탈리아에서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도시의 명소가 됐다”고 말했다.
예술의 상상력이 사회를 깨우고 건축이 도시를 세상 바깥으로 인도한 그라츠. 이 도시는 이제 더는 빈과 잘츠부르크의 영광에 가리지 않는다.
그라츠=이영범
경기대 건축대학원 교수
▼공공의 미술…도심광장에 투명엘리베이터 “천국의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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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츠 동쪽 구도심 한복판 광장에는 건물도 없는데 투명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다. 성모 마리아 상과 나란히 서 있는 도심 엘리베이터는 시민들에게 천국으로 오르는 구원의 계단을 경험하게 하기 위한 것일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15m 상공에서 시청 앞 광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색다른 전망이 펼쳐진다.
이 엘리베이터는 2003년 이후 그라츠에 세워진 도심 내 공공미술 작품 중 하나다. 그라츠의 공공미술은 시각만이 아니라 청각까지 자극한다. 기이함에 그치지 않고 웃음을 자아내 시민들에게 여유를 갖게 한다.
그라츠 철도역 내부는 주사위 내부처럼 정육면체에 가깝다. 벽과 천장에는 붉은 빛의 물결이 그려져 요동친다. 이 역동적인 이미지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간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며 환상 체험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쿤스트하우스의 표면은 밤이면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변한다. 곡면으로 된 청색 아크릴 안쪽에 700개의 원형 형광등이 설치돼 있다. 하나하나가 픽셀로 작용하는 이 형광등은 컴퓨터로 컨트롤되면서 건물 표면에 다양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소리예술가인 막스 너이하우스는 쿤스트하우스에 소리까지 부여했다. 이 건물은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시 정각 10분 전에 5분간 초저음의 진동음을 낸다.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가는 낮은 울림으로 건물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시민들과 매일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다양한 산업박람회가 열리는 ‘슈타트할레’(시민센터)에는 ‘달라이 라마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지붕을 인 건물이 있다. 2003년 그라츠를 방문한 달라이 라마와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모였던 청중 1만여 명을 수용했던 메인홀의 거대한 지붕(길이 150m, 폭 70m)은 건물 밖을 넘어 도로 위까지 기형적으로 튀어 나와 있다. 나른하고 평온한 도시에 뭔가 강렬한 인상을 던져주는 엄청난 물건이다.
이 밖에 그라츠의 어머니 산인 슐로스베르크 산에 지하암굴을 뚫어 만든 예술공연장, 어린이 박물관에 설치돼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는 콘크리트 아트 작품도 유머러스한 도심의 휴식처다.
그라츠=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10>영국 글래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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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학단지를 도심에
도심 남쪽 7만6000여 평에 이르는 ‘퍼시픽 부두(Pacific Quay)’는 글래스고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조선소와 부두가 차지하고 있던 퍼시픽 부두는 이제 ‘디지털 미디어 캠퍼스’로 변모 중이다.
원래 개인 소유였던 이 땅은 주택지로 개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도시의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주거단지가 만들어져도 수요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개발계획은 계속 지연됐다. 결국 스코틀랜드 개발청 글래스고 지부(SEGL·Scottish Enterprise Glasgow)가 땅을 사들였고 아예 용도를 바꾸어 ‘디지털 미디어 캠퍼스’로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왜 도심에 산학단지였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글래스고 시에는 기계 설계나 조선업, 전자제품 조립 등이 융성했다. 그러나 인구가 줄고 공장들이 점차 동유럽과 아시아로 옮겨감에 따라 ‘명성’은 급격히 쇠퇴했다. 새로운 성장산업이 필요했던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의 경쟁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결국 ‘전화’나 ‘페니실린’의 원천기술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곳답게 미래 발전 역시 이 같은 정보기술(IT)과 생명공학기술(BT)의 범주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후 글래스고 시는 대도시이면서 공장 단지들이 상당 부분 공동화(空洞化)된 도심에 각종 대학과 연구개발센터를 모으기로 계획을 세웠다. 마침 전통의 글래스고대와 스트라스클라이드대는 정보통신 특화과정까지 갖추고 있었다.
2001년 과학센터가 건설되면서 ‘디지털 미디어 캠퍼스’ 조성에 속도가 붙었다. 아이맥스 영화관과 105m 높이의 글래스고 타워가 세워졌고 공원과 식당 레저시설 등이 속속 입주했다. 현재 BBC의 스코틀랜드 헤드쿼터가 이주 중이고, 인디 방송채널 S-TV와 채널 4도 입주할 예정이다. 새로 들어서는 방송사들은 시설비용이 많이 드는 스튜디오 등을 공유해 제작비를 절감할 수 있다.
SEGL의 임원 앨런 스티븐슨 씨는 “3개 종합대학과 10개 단과대학이 있는 글래스고의 인적자원을 이용한 산학 합작투자가 바로 글래스고 산업단지의 장점”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기술 개발을 위해 대학과 공동연구가 이뤄지고, 정보 공유와 자유경쟁이 활발한 것이 글래스고 첨단 미디어 산업단지의 경쟁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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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도시 계획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묶어
‘디지털 미디어 캠퍼스’ 같은 글래스고 재개발계획의 첫 단계는 자료의 집대성이었다. 1998년 글래스고 시의회는 각 지역구 의회가 입안 중이던 43개의 크고 작은 도시 관련 프로젝트를 상세히 검토했다. 각각 다양하게 준비되고 추진된 것들이었지만, 글래스고 시는 미래 20년을 내다보는 도시 건설을 위해 기존의 43개 지역계획을 통합하는 도시 전체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처음으로 하나의 서류에 장기적 도시재개발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이 바로 ‘더 시티 플랜(The City Plan)’ 이다. 이 지침은 4년마다 다시 검토돼 세부적인 개발의 원칙과 전략을 점검한다. 개발 시나리오를 발전시키고, 그것을 추진할 실행 주체와 주요 전략을 결정하는 절차를 거치도록 한 것이다.
꾸준하고 면밀한 계획과 자료의 집대성, 도시의 물리적 경제적 환경 모두를 포괄하는 정책, 행정과 의회, 민간부문을 망라하는 여러 추진 주체의 조율, 구체적이고 조직적인 운영전략과 분업화, 오래된 도시 기반시설과 대조되는 초현대식 디자인에 대한 수용…. 이것이 인구 61만 명에 1만1000개의 회사를 가지고 서비스산업이 도시 총생산의 79%를 차지하는 첨단산업도시로 글래스고가 스스로를 변신시켜 온 밑바탕이다.
스코틀랜드 건축 도시 디자인 센터의 프로그램 개발 사무국장 모라그 바인 씨는 “디자인은 우리의 환경을 탈바꿈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좋은 디자인은 일상의 것들을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 보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글래스고=정현아 DIA건축연구소 대표
▼형형색색 조명… 글래스고는 밤에 화장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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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어둑어둑해지고 부슬비조차 그칠 줄 모르는 글래스고의 늦겨울 오후. 그렇지만 이 도시에 음산함이 아닌 로맨틱한 운치가 감도는 이유는 왜일까. 글래스고 시의 독특한 ‘조명(lightning) 프로젝트’ 때문이다. 시는 2002년 3월부터 별도의 ‘조명 전략팀’을 운용 중이다. 창조적인 디자인의 총천연색 경관 조명등을 도시 곳곳에 적절히 배치하고, 민간 건물이라도 주요 입지에 있는 것은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게끔 ‘조명 가이드라인’을 설정해 줘 도시를 수준 높은 예술품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면 도심 곳곳에 세워지는 대형 트리 불빛부터 각 건물에 조그맣게 붙는 배너 광고 조명까지 조명 전략팀이 모두 관여한다.
시를 흐르는 클라이드 강변에 새로 세운 다리나 건물은 아예 설계 때부터 조명을 염두에 둔 것들로, 보라색이나 분홍색처럼 강한 색상을 사용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글래스고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과학센터 빌딩이나 BBC스코틀랜드 본사 건물도 밤이면 삼중 사중으로 겹친 컬러 조명들이 건물을 파고들 듯이 비춘다. 몇백 년의 역사가 깃든 옛 건물들도 조명계획이 시행되는 데 예외는 아니다.
시청 도시디자인팀에 따르면 앞으로 3년간 주요 번화가 가로수 조명등 정비사업에 104만 파운드(약 18억2000만 원)의 시 예산과 각종 민간펀드 수익금이 투입될 예정이다.
오후 4시만 돼도 헤드라이트를 켠 차가 눈에 띌 정도로 글래스고의 겨울은 낮이 짧다. 겨울철 시내 가로등은 오후 5시면 켜져서 이튿날 오전 9시가 돼야 꺼진다. 쇼핑몰이나 식당, 바들이 밀집해 있는 머천트 거리에서는 형형색색도 모자라 발광 강도가 큰 형광색 조명으로 시선을 붙든다. 가로등도 주홍빛이 아니고 연두색으로 빛난다. 전체적인 글래스고 시내의 조도는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조명등이 있는 곳은 마치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처럼 집중효과가 크다.
스코틀랜드 관광청(visitscotland.com) 마케팅 담당 컬스티 인 씨는 “글래스고가 대도시인 런던이나, 중세 성곽들로 가득 차 있는 전통도시 에든버러와 차별화되는 ‘모던 유럽’의 정체성을 쌓게 된 데는 ‘실험정신이 가득한 조명등’의 역할이 크다”고 말했다.
글래스고=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11>일본 이시카와 현 가나자와
![]() 日 3대 정원의 하나 일본 3대 정원의 하나로 꼽히는 겐로쿠엔. 에도시대의 대표적 정원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3만5000평 규모의 이 정원은 가나자와 시 한복판에 있다. 겐로쿠엔은 새로 지어진 ‘21세기 미술관’과 잇닿아 명소로 더욱 각광받고 있다. 사진 제공 가나자와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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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산업을 도시의 경제 기반으로
가나자와의 첫출발은 ‘문화의 보존’이었다. 근대화가 가나자와를 비켜 간 덕분에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기도 이 도시를 조준하지 않았다. 가나자와 시는 종전이 되자 마치 준비라도 했다는 듯 일본 전국에서 가장 먼저 문화재보존조례를 제정했다. 에도시대, 밤이면 게이샤들의 웃음소리가 흐드러져 게이샤거리로 불렸던 히가시차야(東茶屋) 거리는 일본 전통차와 지역의 특산물을 파는 거리로 재정비됐다. 옛 무사들이 활보하던 거리인 나가(長) 정 부케야시키(武家屋敷)도 다시 가꿨다.
보존은 단지 옛것을 되살리는 데 있지 않았다. 가나자와는 외부에서의 자본 유입에 목말라하는 다른 도시와는 달리 ‘내발(內發)적 발전’ 모델을 택했다. 외부의 자본에 기대기보다는 지역이 가진 제조, 유통, 서비스 등의 전통적 산업을 보존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경제적 효과를 지역 내에 남기기로 한 것이다.
가가유젠(加賀友禪·일본 전통 의복을 만드는 염색 옷감), 금박, 구다니(九谷)자기 등의 지역 전통산업이 시대에 맞게 다시 태어났다. 시는 전통 기술을 이어 갈 다음 세대를 육성하기 위해 시립 미술공예대학과 현립 기술고등학교를 세웠다. 우다쓰야마(卯辰山) 공예공방에서는 전통 장인들을 기르고 있다. 가나자와에는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옮겨야 할 공장은 없다.
○ 문화가 일상으로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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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자와 시가 다음 단계로 추진한 것은 ‘문화의 생활화’였다. 시는 과시적인 문화시설을 만드는 대신 문화가 ‘일상’이 되도록 작은 오케스트라를 만들고 시민들이 각종 예술 교육, 수련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배려하는 지원정책을 펼쳤다. 1996년 문을 연 ‘시민 예술촌’은 스스로 문화 활동의 주체가 되려는 시민들의 구심점이다.
가나자와는 이제 세 번째 단계인 ‘문화의 세계화’로 나아가려 한다. 1995년 발표된 ‘가나자와 세계 도시구상’이 그 청사진이다.
시는 ‘세계 도시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가나자와를 컨벤션 도시로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2005년 한 해 이 도시에서는 324건의 크고 작은 회의가 열려 8만 명의 외지인들이 찾아왔다. 가나자와 컨벤션 사무국의 책임자 니시다 데쓰지(西田哲次) 씨는 “컨벤션 산업은 잘 가꾸어진 자원이 있는 가나자와를 알리는 데 기여한다”고 그 중요성을 설명했다. 시는 국제회의가 열리면 1인당 1만2000엔(약 10만8000원)의 유치 지원비를 준다. 그래도 손해 보지 않는다는 계산 때문이다.
니시다 씨는 “컨벤션 참가자들은 1인당 평균 5만7000엔을 소비하기 때문에 지난해에도 100억 엔(약 900억 원) 규모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가나자와 시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 전통으로 남기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시는 2004년 10월 시청 옆 공원에 깔끔하고 투명한 원형의 ‘21세기 미술관’을 탄생시켰다. 세지마 가즈요(妹島和世) 씨가 설계한 이 미술관을 보기 위해 개관 첫해에만 이 도시 인구의 3배가 넘는 157만 명이 가나자와를 방문했다. 미술관은 가나자와의 전통적 명소인 겐로쿠엔(兼六園)이라는 아름다운 정원과 잇닿아 있다. 또 시민들이 쇼핑을 즐기고 이웃들을 만나는 가타(片) 정의 중요 상권과도 직접 연결된다.
‘발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장’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뜻도 모를 세계화로 자신들을 내던지려는 천박한 시대에 완만한 속도로 도도하게 삶의 질을 키워 나가며 그것을 지역의 발전과 세계화로 연결시키고 있는 가나자와는 그 점을 진정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가나자와=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시민 30%가 아마추어 예술가로 활동
가나자와 시민 3명 중 1명은 스스로를 “아마추어 문화 예술가”로 분류한다. 상당수 시민이 음악, 미술, 공연 동호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문화예술 활동의 중심에는 1996년 문을 연 ‘시민 예술촌’이 있다. 가나자와 시민이라면 누구나, 또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도록 24시간 개방된 공간이다.
당초 이 예술촌은 1910년에 세워진 2만9000여 평 규모의 방직공장이었다. 가나자와 시가 대피소 용도로 사들여 시민의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시킨 것이다. 시설 이용률이 연간 65.3%에 총인원 기준으로 연간 20만 명이 찾는다니 ‘구색 맞추기’ 수준의 시설은 아닌 셈이다.
시민 예술촌 안에는 공연이 가능한 대형 홀이 3개 있고, 복도를 따라 용도에 맞는 다양한 크기의 연습실이 있다. 공장 건물의 분위기가 살아있으면서도 시민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곳곳에 현대적 감각이 덧칠돼 있다.
하루 24시간 개방되는 이곳에서 시민들은 연극, 음악, 그림, 춤 등을 연습한다. 모두 자생적 모임이다. 이용료는 6시간 기준으로 방 규모에 따라 1000∼5000엔(약 9000∼4만5000원) 수준이다.
평일 오후 7시가 되자 일을 마친 시민들로 연습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방음설비가 돼 있는 한 연습실에서 2명의 직장인이 신나게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고 잠시 인터뷰를 청하자 “방해받고 싶지 않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
옆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200여 평 규모의 대형 홀이 시끌벅적했다. 아마추어 록 밴드가 라이브 공연을 앞두고 ‘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다. 밴드의 리더 시미즈 세이치(淸水誠一·41) 씨는 “한 달에 두세 번 단원들과 함께 이곳을 찾고 있다”며 “적은 비용으로 모든 것이 갖춰진 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가난한 음악인에게 축복”이라고 말했다.
호시바 이치로(干場一郞) 예술촌장 보좌는 “예술촌 운영에 연간 2억 엔(약 18억 원) 정도의 세금이 쓰이지만 시민들은 ‘내가 커피 한 잔 덜 마시면 된다’며 이곳에 애정을 보내고 있다”고 말했다.
가나자와=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12>獨 프라이부르크 보방지구
![]() 울긋불긋 태양열 주택… 그 자체로 명물 ‘햇볕 바라기’를 하는 프라이부르크 시 보방지구의 태양열 주택. 보방의 집들에는 30cm 이상 두께의 단열재가 사용됐다. 덕분에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석유 없이 햇빛만으로도 충분히 난방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태양열 집열판과 조화를 이룬 색색의 벽은 그 자체로 보방의 명물인 도시 디자인이다. 사진 제공 서현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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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이런 당황스럽지만 합리적인 질문이 오늘의 보방지구를 만든 원동력이다.
독일 남서부 프라이부르크의 미니 신도시인 보방지구.
이곳의 거리 풍경은 나른하다.
꼬마들이 탄 수레를 매단 자전거, 장애인이 탄 휠체어가 자동차 경적소리에 위협받지 않고 느릿한 속도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건물 옥상에 줄지어 선 태양열 집열판은 이 도시 특유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 주민 아이디어로 만든 자동차 없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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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환경수도(首都)’로 널리 알려진 프라이부르크 시는 인구 20만 명 중 3만 명이 학생인 학원도시. 녹색당이 의회 다수를 점유하고 시장도 녹색당 소속이다. 보방지구는 그 프라이부르크 안에서도 보행자 중심의 거리 환경과 환경친화적 건물들로 새롭게 조명받는 곳이다.
독일 땅인데도 보방이라는 프랑스식 지명을 갖게 된 이유는 이곳이 프랑스군 주둔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줄곧 이곳에 머물렀던 프랑스군은 독일 통일과 함께 철수했다. 주택 부족으로 고심하던 프라이부르크 시는 프랑스군이 남긴 빈 땅을 사들여 신도시를 만들기로 했다. 도시 외곽을 확장하는 것보다는 도심 인근에 밀도가 높은 신도시를 만드는 것이 합리적이었던 것이다. 10만 평이 조금 넘는 면적에 5000명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미니 신도시 개발이 시작됐다.
보방과 여타 신도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개발의 기본 아이디어가 입주민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보방 개발을 시작하며 시 정부는 몇몇 자원봉사자들이 구성해서 운영하던 ‘포럼 보방’이라는 시민단체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묻기 시작했다. ‘포럼 보방’은 시 정부의 주택국, 보방신도시조성위원회와 함께 도시 건설의 주요 축이 됐다.
‘포럼 보방’은 잠재적인 입주 대상자들을 찾아내 이들에게 바라는 도시의 모습을 물었다. 입주민들의 요구는 용적률을 높여 달라거나 자기 집 앞으로 길을 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집 앞이 주차장 대신 아이들 놀이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것과 같은 소박하지만 구체적인 것이었다.
시는 집 면적에 비례해 강제로 주차장을 짓도록 한 조례를 개정했다. 첫 입주지역에 시범적으로 집집마다 주차장을 짓는 대신 공용의 주차빌딩 두 개를 지었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은 집 앞에 주차장을 만드는 대신 이 주차빌딩의 주차공간을 사야 한다. 그 대신 주차장이 들어섰어야 했을 집 앞 마당은 화단과 놀이터가 됐다. 물론 집 앞에 자동차 진입을 완전히 금지하지는 않았다.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급한 용무가 있을 경우에는 잠시 주차를 허용한다. 간선 도로변에는 방문객을 위한 노상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집 주위에서 자동차가 사라지고 환경이 안정되니 거리가 놀이터가 됐다. 보방지구에는 어린이를 키우는 입주민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시범지역에서 시작한 주차장 자유구역은 현재 보방 전체 면적의 4분의 3 정도로 늘어났다.
○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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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의 또 다른 요구는 환경친화적인 집이었다. ‘포럼 보방’은 태양열 주택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해 입주 예정자들에게 태양열 주택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알려주었다. 한국 집들의 벽체에 5cm 정도의 단열재가 사용되는 데 비해 보방신도시 주택에 들어간 단열재의 두께는 30cm가 넘는다. 태양열 집열판을 통해 혹한기를 제외하고는 외부에서의 별도 에너지 공급이 필요 없는 주택이 되었다.
시 정부는 거대 기업에 일괄적으로 토지를 공급하지 않았다. 밀도 높은 도시를 지향했던 만큼 단독주택을 짓겠다는 개인들에게 공급하지도 않았다. 작은 조합을 조성한 입주자들에게 토지를 공급하고 이들이 여러 건축가에게 설계를 의뢰하게 했다.
건축 경험이 없는 입주자들은 ‘포럼 보방’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따라 지켜야 할 것과 요구해야 할 것을 숙지하고 건축가와 대화를 해 나갔다. 그 결과 집의 규모는 일정하게 유지되지만 도시에는 다양한 모습의 건물들이 들어서게 됐다.
건물의 가로변 1층에 상업공간들이 유치되면서 굳이 입주자들이 차를 타고 외부로 쇼핑을 나갈 필요가 없어졌다. 거리에 보행자들이 많아지다 보니 장사도 잘되고 장사가 되다 보니 이 상업공간들이 자연스럽게 주민들의 모임 장소 역할도 하게 됐다.
주민 입주가 끝난 지금 ‘포럼 보방’은 해산했다. 그러나 입주과정에서의 적극적인 의견 표명은 입주민들에게 강한 자부심과 공동체 의식을 심어 줬다. ‘포럼 보방’의 안드레아스 베네스케 전 대표는 자랑스레 말한다. “물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주 작은 발전도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라이부르크=서현 교수·한양대 건축학부
▼회원제 운영 ‘함께 타기’자가용이 필요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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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방지구의 간선 도로변 주차장에는 흰색 승용차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다.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외부에 카 셰어링(car sharing)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차의 소유주는 카 셰어링 협회. 카 셰어링 회원이라면 누구든지 보방지구 곳곳에 주차된 스무 대의 이 흰 자동차를 사용할 수 있다.
자가용이 없는 집에서도 가끔 자동차가 필요할 경우가 있다. 하지만 자가용은 대개 하루의 20시간 이상 주차되어 있기 마련이다. 소유의 방식 외에 자동차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고민 끝에 나온 것이 카 셰어링 제도다. 1987년 스위스에서 시작돼 1988년 독일에 도입된 이 제도는 이미 독일 전역에 널리 퍼져 있다. 그중에서도 보방지구는 이 제도를 가장 활발하게 이용하는 곳으로 이름 높다.
민간회사에서 운영하는 이 제도는 회원들의 가입비와 자동차 이용료로 운영된다. 보방지구에 배정된 20대의 자동차들은 간선 도로변의 지정 노상주차장에 항상 세워져 있다. 회원들은 인터넷이나 전화를 통해 자동차 사용을 예약하고 이용번호를 받는다. 자동차 내부의 칩에 이용번호를 입력하면 자동차 키가 나온다. 물론 이용한 다음에는 원래 자리에 세워 놓아야 한다. 보방지구의 경우 집에서 최대 300m 이내에 자동차들이 있으니 굳이 자기 자동차를 가질 필요가 없다.
보방지구 카 셰어링 회원인 게오르크 그로세 씨는 사흘에 하루꼴로 이 자동차를 이용한다. 보방으로 이사 오면서 갖고 있던 차를 팔았다는 그는 “무엇보다도 초등학생 딸이 길에 나가 놀아도 차 조심하라는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즐겁다”고 자랑했다.
[도시, 미래로 미래로]<13> 스페인 빌바오
![]() 구겐하임 미술관 앞 산책로. 네르비온 강물을 미술관의 일부로 끌어들이기 위해 산책로의 좌우를 잇는 보행자 전용 구름다리를 만든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거미’라는 이름이 붙은 거대한 조각 밑을 통과하는 것도 구겐하임 미술관을 찾는 즐거움 중의 하나다. 사진 제공 이영범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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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시작은 ‘쇠락’이었다. 이 도시의 경제를 이끌던 철강과 조선산업이 1980년대 이후 급격한 사양의 길로 접어들면서 빌바오는 위기에 빠졌다. 도시를 가로질러 비스케이 만(灣) 으로 흘러드는 네르비온 강 주변의 항만과 공업지대는 슬럼이 되어 갔다.》
그러나 빌바오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변화는 도시 중심에 인접한 아반도이바라 지역에서 시작됐다. 11만 평에 이르는 이 지역의 항만, 창고와 화물철도역이 구겐하임 미술관이 건설되고 컨벤션홀과 음악당이 들어서는 문화지구가 됐다. 20년 전 철광석을 실은 배들이 빽빽이 오르내리던 강은 이제 휴식공간으로 시민들의 차지가 됐다.
○시민에게 되돌려진 네르비온 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가장 눈여겨볼 점은 미술관 그 자체의 명성보다 미술관 가는 길이 즐겁다는 것이다. 강 건너편 주택가의 시민들은 금속공예 작품 같은 백색의 ‘페드로 아루페’ 다리를 건너 미술관으로 간다. 아반도이바라 동쪽 옛 도심에 사는 시민들은 3km에 이르는 산책로를 따라 걷거나 조깅을 하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미술관으로 온다.
시는 시민들의 미술관 가는 길이 즐거워야 한다는 것을 구겐하임 미술관을 건설할 때부터 구상했다. 제 아무리 빼어난 건축물이라 하더라도 시민들이 찾기 어렵다면 ‘죽은 공간’이 되고 만다는 판단이었다. 그 근저에는 도시의 주체는 시민이지 관광객일 수 없다는 의식이 깔려 있었다. 미술관과 시가 함께 윈윈 하기 위해서는 네르비온 강과 그 주변을 살려야 했다. 좀 더 편리한 이동을 위해 강의 북쪽과 남쪽을 잇는 2개의 보행자 전용다리가 생겼다. 전철이 강변을 따라 운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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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수익은 시민들을 위한 공원과 산책로로
도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변화의 현장에서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팻말은 바로 ‘빌바오 리아 2000(Bilbao Ria 2000)’이다. 1992년 스페인 중앙정부와 바스크 주 정부가 절반씩 투자해 세운 이 개발공사(公社)는 공공부문이 소유하고 있는 도시의 버려진 땅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내는 실행조직이다.
빌바오의 도시 재편은 이 기관의 출발과 함께 시작됐다. 이 공사는 버려진 공공부문 소유의 땅을 호텔이나 주택단지로 개발해 민간에 분양한다. 분양으로 생기는 수익금은 대부분 재개발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원이나 시민운동장을 조성하는 데 쓰이고 강변을 잇는 다리를 만들거나 전철을 건설하는 비용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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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공공부문도 승리자가 될 수 있다”고 빌바오 리아 2000의 홍보담당 이사 카를로스 고로스티자 씨는 자신 있게 말한다. 정부나 지자체는 더는 예산만을 탓하며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30개 公-私기업 합심 ‘도시재생 비전’ 연구
빌바오 성공 신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이다. ‘빌바오 리아 2000’이 재개발사업을 직접 실행하는 공공기관이라면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은 빌바오의 도시 재생과 관련된 장기적 비전과 전략을 수립하는 싱크탱크다. 1991년 결성된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은 바스크 지역의 130여 개 공기업과 민간기업으로 구성된 민관협력체다. 여기에는 서로 이해관계가 얽히거나 반목하는 시 정부, 은행, 대학, 정유회사, 철강회사, 철도공사, 건설회사, 그리고 미술관과 항공사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조직에는 800여 명의 학자와 전문가가 소속돼 있다.
도시개발 과정에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이해관계는 늘 충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빌바오 메트로폴리 30’을 이끄는 알폰소 마르티네스 세에라 사무총장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사회적 비전이 장기적으로는 민간부문의 이익과 합치한다”고 말했다. 시의 공공영역과 민간부문이 서로 합의하는 궁극적인 근거는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질 향상 없이 도시의 미래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의하에 탄생한 것이 지금 빌바오 시민들이 휴식공간으로 즐거이 찾는 네르비온 강가의 공원과 산책로 미술관 음악당이다.
빌바오=이영범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도시, 미래로 미래로]<14>중국 칭다오
![]() 칭다오의 매력은 19세기와 21세기가 도시 안에 동시에 펼쳐진다는 데 있다. 빨간 지붕의 예쁜 벽돌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고색창연한 시의 서쪽과 고층빌딩들이 들어선 동쪽 신시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 사진 제공 베이징올림픽 요트경기조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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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치욕의 기억이다.
하지만 중국 산둥(山東) 성의
항구도시 칭다오(靑島)는
그 아픈 과거조차
자원으로 삼아
도시의 내일을 일구어 나간다.
칭다오가 독일의 조차지(租借地)였던 시절 지어진 유럽식 건물들은 해변을 따라 고색창연한 이국풍의 경관을 만들어 내면서 이 도시의 가장 경쟁력 있는 자원이 되고 있다.
과거를 간직한 건물들은 칭다오를 단순히 승승장구하는 경제 도시로서만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청정 도시로 자리 매김하게 한다.》
해안선을 따라 길게 형성된 칭다오 시는 도심을 동서로 나누는 타이핑(太平) 산을 기준으로 서쪽은 오래된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역사 지역이, 동쪽으로는 새로 개발된 현대적 시가지가 들어서 있다. 도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옛 도심을 허물고 그 위에 신시가지를 건설하지 않고, 도시를 동쪽으로 확장한 것은 칭다오 시의 현명한 판단이었다.
칭다오의 매력은 서로 다른 시간대의 공존이다. 해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를 걷거나 도시 전체의 조망이 가능한 신하오(信號) 산에 올라가 시가지를 굽어보면 이 도시의 과거와 현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칭다오는 1897년부터 20년 동안 독일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그 기간에 근대 도시로 발전했다. 서쪽 해안지구에 남아 있는 많은 유럽풍의 건물들과 거리는 그 시절 개발됐다.
빨간 박공지붕을 인 누런색 벽돌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서쪽 해안은 숲과 잔디에 둘러싸인 완만한 언덕배기다. 독일 건축가들이 개발한 이 지역은 독일 양식의 건축물 외에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영국, 프랑스, 덴마크, 스위스, 일본 등에서 유행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어 ‘건축 박물관’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다.
장강중 거리에서 만난 린훙(林宏) 씨는 “칭다오가 중국의 여느 도시와 다른 점은 ‘중국 안의 유럽’을 느낄 수 있다는 독특한 개성 때문”이라고 말했다.
식민시대 건축물들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 데는 ‘건축보존협회’의 역할이 컸다. 1982년 칭다오 시 문화재관리국에 흡수된 이 협회는 첫 사업으로 시내의 많은 역사적 건물들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독일 정부가 주둔했던 총독부나 영빈관 같은 중요 공공건물들만이 포함됐지만 점차 그 대상을 민간 소유의 주택이나 상업건물에까지 확대했다. 이 작업은 2005년까지 일곱 차례 계속돼, 이제 리스트에 기록된 건물은 모두 220개에 이른다. 보호 대상은 단일 건축물만이 아니다. 역사적인 건물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지역이나 돌로 포장된 가로(街路)까지 포함된다.
건물이 공식적으로 등록되면 정부의 보호와 관리를 받게 된다. 지정된 건물의 외부는 개조할 수 없고, 내부는 문화재관리국의 허가를 받아야 변경할 수 있다. 등록된 역사적 건물로부터 50m 떨어진 곳까지는 보호구역을 설정해 건물을 함부로 짓지 못하게 한다. 또 200m 내에 신축되는 모든 건물은 시 당국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문화재관리국의 류훙옌(劉紅燕) 씨는 “이런 건물들의 보존은 단지 역사적 가치로서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주변 항구도시와 차별화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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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들은 경쟁 관계다. 특히 항구도시의 경우 인접한 두 도시가 동시에 성장하기는 힘들다. 비슷한 전략을 취하는 항구도시들 사이에서 칭다오는 개성 있는 도시 환경과 역사유적으로 차별화의 길을 찾았다.
칭다오 시청 건설국의 판난 씨는 “칭다오 시의 강점은 도시가 구역별로 성격이 분명하면서도 다른 구역으로의 이동이 쉽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옛것을 허물고 손쉽게 새것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옛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새것과 나란히 둘 때, 그 가치는 대조를 통해 배가된다. 칭다오는 지금까지 ‘환경보호 모범상’, ‘도시 녹화상’, ‘거주 환경상’ 등을 수상했다.
칭다오=정현아 DIA건축연구소 대표
●美港 내세워 베이징올림픽 요트경기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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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베이징에서 훨씬 가까운 허베이(河北) 성의 친황다오(秦皇島)가 협력도시로 내정되어 있었다. 친황다오에서는 이미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때 요트경기가 열린 적이 있고 무엇보다 베이징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겅(夏耕) 현 칭다오 시장과 두스청(杜世成) 시 위원회 서기는 백방으로 노력해 2001년 국제요트협회(ISAF) 전 회장인 폴 헨더슨의 방문을 이끌어 냈다. 그는 곧바로 칭다오의 아름다운 환경에 매료됐고 결국 칭다오를 베이징의 파트너 도시로 지정하는 데 적극 나섰다.
칭다오는 도시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고속화 도로를 해변이 아닌 내륙에 건설해, 도시 안의 어떤 거리에서든 해안까지 걸어서 접근하는 데 보행자가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또 수려한 해안을 낀 장점을 살리기 위해 총 40km에 이르는 해변 산책로를 조성했고, 그중 9.5km를 나무 데크로 새롭게 포장했다.
[도시, 미래로 미래로]<15>핀란드 아라비안란타
![]() 눈 덮인 아라비안란타 지역을 달리는 경전철. 이 경전철은 아라비안란타와 헬싱키 도심을 10분 이내에 연결해 준다. 아라비안란타는 현실의 마을과 사이버 공간의 가상 마을이 동시에 건설되는 헬싱키 시의 야심작이다. 사진 제공 서현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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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는 핀란드 헬싱키 도심에서 동북쪽에 있는 해안가의 자기공장 이름.
20세기 중반까지 유럽 최대의 생산량을 자랑하던 이 공장이 생산을 멈춘 후 옛 공장 건물에는 ‘핀란드 디자인의 실험실’이라 불리는 헬싱키 미술대가 입주해 있다.
아라비아 공장 때문에 ‘아라비아의 해안’이라는 뜻의 아라비안란타라는 이름이 붙었던 이 지역은 지금 헬싱키에서 가장 야심적인 도시 실험이 벌어지는 곳이다.》
○ 사이버마을과 오프라인마을 함께
헬싱키는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함께 유럽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인구가 늘고 있는 도시다. 헬싱키 시청 도시계획과에 붙어 있는 시 지도에는 큼지막한 동그라미가 여기저기 표시돼 있다. 현재 도시 재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지구는 7곳, 2010년까지 사업에 착수해야 할 곳은 6곳이다.
인구 증가는 필연적으로 주택 부족 문제를 부른다. 그러나 헬싱키 시의 목표는 충분한 주택을 공급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를 기회로 도시의 경쟁력을 키우는 질적인 실험을 병행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쇠락한 공장지역인 아라비안란타의 재개발. 목표는 2010년까지 1만2000명의 상주인구, 9000개의 일자리, 그리고 600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시는 우선 경전철의 노선을 연장해 이 지역을 도심과 연결했다. 공장이 모여 있던 곳에는 정보통신 벤처기업들과 재즈음악원을 유치했다. 필요한 주거지는 바닷가 옛 항구 부근에 만들기 시작했다. 항구는 쇠락해도 바다는 변하지 않는 법. 항구에 휴양지를 방불케 하는 주거지가 조성됐다. “전철를 타고 10분이면 도심에 도착할 수 있는데도 아파트 창밖으로는 수평선이 보여요.” 아라비안란타의 주민 안나 알렌 씨의 자랑이다.
아라비안란타가 핀란드는 물론이고 유럽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단지 퇴락한 공장지대를 일급 주거지로 만들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라비안란타에서는 모든 도시 구성원들이 인터넷 공간의 도시정보에 무선통신으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는 ‘헬싱키 가상마을계획(Helsinki Virtual Village)’이 진행되고 있다.
아라비안란타의 모든 사무실과 상점, 학교, 개인 집을 인터넷과 무선통신으로 연결해 가상마을(www.helsinkivirtualvillage.fi)을 만드는 작업은 지금 진행되고 있다. 이 홈페이지가 완성되면 아라비안란타 주민의 일상은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집을 얻으려면 부동산 중개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가상마을에 접속해 임대시장에 나온 아파트를 찾으면 된다. 쇼핑을 나갈 때는 미리 슈퍼마켓의 재고를 확인하고 집을 나선다. 휴대전화로 택시를 부르면 택시가 알아서 위치를 찾아온다. 현실의 도시와 무선 커뮤니티가 일체화한 세계 최초의 예가 되는 것이다.
○ 디자인과 정보통신 기술이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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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란타의 ‘가상마을 계획’이 실현되기 이전에 헬싱키 시는 이미 여러 가지 시도를 해왔다. 그 한 예가 1999년까지 시 전체를 컴퓨터에 3차원으로 만들어 넣기로 했던 ‘헬싱키 애리너 2000’. 이 계획이 중지된 것은 빅 브러더의 출현을 염려하는 목소리 때문이 아니라 기술적인 것이었다.
국립대학인 헬싱키 미술대가 임차해 쓰고 있는 아라비아 공장 건물은 아직 민간기업 소유다. 그러나 그 주변의 땅은 모두 헬싱키 시 소유다. 헬싱키 면적의 70% 정도를 소유하고 있는 시 정부는 택지 개발을 하면서도 민간에 땅을 거의 팔지 않는다. 토지이용권만 장기계약으로 양도하고 임대료를 받는다. 한번 분양한 땅은 시가 다시 통제하기 어렵고 그만큼 미래를 대비한 장기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헬싱키 시는 토지이용권을 양도하더라도 최고 수준의 건물을 지을 것을 요구한다. 건축가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현상공모를 하든가, 자격을 지닌 건축가를 섭외해 시의 동의를 얻을 것을 계약조건으로 내거는 것이다. 이는 최고의 디자인을 얻기 위한 장치다.
아라비안란타의 실험은 결국 핀란드의 국가 경쟁력인 디자인 역량과 정보통신 기술력의 결합이다. 현대의 디자인은 컴퓨터가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여기에 정보통신이 추가되면 날개를 달게 된다.
경쟁력의 결론은 자본과 관광객의 도시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도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헬싱키 미술대 도서관의 사서인 리타리사 레스키넨 씨는 자신이 지켜 보아온 아라비안란타의 변화를 이렇게 말했다.
“점점 사람이 많아지고 활기가 넘쳐서 좋습니다. 이렇게 한국에서도 찾아 올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헬싱키=서현 교수 한양대 건축학부
■도시와 자연 사이에 금긋지 마세요…환경도시모델 ‘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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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안란타보다 더 동북쪽에 있는 비키. 벌판에 헬싱키 생명과학대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서 있었던 이곳은 이제 도시와 자연의 공존, 다양한 계층의 더불어 살기라는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재개발 지구로 평가받는다.
헬싱키 시는 비키를 개발하며 일부를 시범사업지구로 지정했다. 에너지 관리, 오폐수 관리 등에서 현행 법규보다 훨씬 강력한 기준을 세웠고 입주 이후에는 사후 평가서도 제출하도록 개발사업자들에게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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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양가구보다 임대가구의 수가 더 많도록 비율도 규제했다. 개발사업자는 분양가구 비율을 높이려 하지만 저소득층은 임대가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감안한 것이었다.
이런 기준에 따라 도시를 개발한 업자들은 도시와 자연 사이에 금을 긋지 않았다. 건물이 들어서지 않는 곳은 나무, 돌을 원래대로 거의 살려두었다. 이런 공간은 이제 어린이들이 뛰어놀고 주민들이 대화를 나누는 마당이 되었다.
입주 이후 비키 지역은 헬싱키에서 가장 좋은 주거 단지로 소문이 났다. 소득 수준과 관계없이 입주자들의 학력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입주민의 80% 정도는 비키의 자연친화적인 환경이 입주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고려 요소였다고 답했다.
시범단지에서 환경친화적 건물을 만드는 데 추가되는 비용은 공사비의 5% 정도였다. 추가공사비는 어렵지 않게 회수된다.
[도시, 미래로 미래로]<16>인도 방갈로르
![]() 오토바이와 오토릭쇼로 출근하는 인파로 붐비는 방갈로르 시의 아침. 인도 전체 정보기술(IT) 인력의 3분의 1로 추정되는 40만여 명의 IT 산업 종사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방갈로르의 경쟁력이다. 인도 이공계 교육기관 중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인도과학연구소 등 방갈로르에서 한해 졸업하는 이공계 대학생들만 3만여 명에 이른다. 사진 제공 정현아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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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갈로르는 IT 산업기지가 들어서기에 도로나 전기, 수도 등의 기반시설이 열악했다. 그렇다고 개발의 경제적 부담을 안기에는 시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었다.
○ IT회사만 1639개
방갈로르에는 살아 있는 자원이 있었다. 바로 컴퓨터와 공학 일반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갖추고 영어에도 능통한 고급인력이 풍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방갈로르 시에서만 매년 3만 명이 넘는 공과대 졸업생이 배출된다. 이들의 임금이 영미권에 비해 싼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방갈로르 시의 경제를 살찌우기 위해 다국적 기업의 유치가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방갈로르가 해발 900m가 넘는 고원지대에 있어 인도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쾌적한 기후조건을 갖고 있다는 것이 또 다른 매력요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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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과감히 외국 기업의 토지세와 등록세를 면세하는 조세 지원 정책을 폈다. 매년 10, 11월에 350개의 IT 관련업체가 참여하는 이벤트 ‘방갈로르 인(bangaloreit.in)’을 개최해 기업을 홍보하고 인재들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방갈로르는 이런 정책 지원 아래 빠르게 성장했다. 2006년 현재 도시를 누비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는 매일 600대씩 늘어나고, 매주 4개의 IT 회사가 생겨나고 있다. 방갈로르엔 인도 전체 IT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40만 명의 직간접 IT 산업 종사자가 있고, 654개의 다국적기업과 총1639개의 IT 회사가 있다.
방갈로르 시의 서남부에는 우리의 구로 디지털산업단지를 연상시키는 전통전자산업단지 피냐가 오래전부터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1986년부터 시의 동남부 화이트필드 지역에 외곽순환도로를 끼고 ‘일렉트로닉 시티’와 ‘인터내셔널 파크’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방갈로르의 값싼 고급 기술 인력을 이용하기 위해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사가 입주한 것이 계기였다. 주 정부도 1991년 ‘소프트웨어 파크(STP·Software Technology Park)’를 조성했고, 단지는 매년 확장되어 ‘일렉트로닉 시티’라는 이름까지 갖게 되었다. 이제 그 규모는 55만여 평에 이른다.
‘일렉트로닉 시티’의 성공은 1997년 8만4000평 규모의 ‘인터내셔널 파크’ 건설로 이어졌다. 이 사업에는 카르나타카 주 당국만이 아니라, 인도기업인 타타그룹, 싱가포르 컨소시엄이 함께 참여했다. 24시간 전기가 공급되는 ‘인터내셔널 파크’엔 현재 IBM, 위프로(WIPRO), 임포시스(IMFOSYS), 오라클(ORACLE) 등 110개 이상의 회사가 입주해 2만여 명이 일하고 있다. 방갈로르 공과대 3학년인 쿠리슈나 B R 씨는 “졸업 후 도시 인근에 입주해 있는 외국기업들과 함께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방갈로르의 성공은 첸나이, 하이데라바드, 망갈로르 등 다른 인도 도시들에 모범 사례가 됐다. 신흥 IT 도시들의 등장은 이제 방갈로르에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급증한 도시인구와 나날이 늘어가는 교통체증, 도심의 낙후된 기반시설 개선이 숙제로 남아 있는 것.
○ 도로-공항 등 기반시설 업그레이드 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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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갈로르 시는 2007년까지 시를 운행하는 전철을 완공하고 전통적인 전자산업단지인 피냐와 외국기업체 중심인 동남부의 일렉트로닉 시티를 잇는 109km 길이의 제2외곽순환도로를 건설할 계획이다. 도시 북쪽의 새 국제공항도 2008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되고 있다. 이러한 기반 시설을 발판 삼아 시 남쪽에 치우친 산업단지의 성공을 도시 전체로 확산시키려는 것이다.
외곽순환도로를 건설하고 있는 난디 사의 만주나스 나야커 씨는 “전통적인 전자지구인 피냐 지역과 신흥 IT 지구인 일렉트로닉 시티를 잇는 고속화도로가 건설되면 도로 인근의 개발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방갈로르=정현아 DIA건축연구소 대표
美 기업의 콜센터로 전화 걸면 인도서 “Hello”
고품질 통신기술 ‘BPO 시스템’ 발전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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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의 영어 구사력과 값싼 노동력은 미국 기업의 원거리 서비스 대행시스템을 낳았다. 이른바 BPO(Business Process Outsourcing)라 일컬어지는 시스템이다.
24시간 콜센터나 소비자센터, 전화마케팅 업무는 일과시간 이후의 근무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미국과 12시간 이상 시차가 있는 인도는 사정이 다르다. 미국이 밤 시간일 때 인도에서는 낮 근무를 할 수 있는 것. 이들은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데다 임금은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미국 각 기업의 24시간 콜센터로 걸려오는 전화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인도로 연결되고, 인도인이 전화를 받아 일을 처리한다. 소비자는 늦은 밤에도 불편 없이 제공되는 서비스를, 미국의 회사는 싼 임금의 노동력을, 인도의 근로자는 일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GE사부터 도입된 이 업무시스템은 점차 전화서비스만이 아니라 세무 보고, 회계, 주식 분석 등으로 분야가 확장됐다. 현재 방갈로르에는 캐피톨1(CAPITOL1), 위프로(WIPRO), 델, 윈스(WINS), 엠퍼시스(MPHASIS) 등 132개 BPO회사들이 있다.
미국 기업들이 BPO산업 기지로 방갈로르를 선택하는 것은 IT산업이 발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품질 통신기술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있고, 회계 주식 분석 등을 담당할 수학에 능한 고급인력이 있기 때문이다.
카르나타카 주 정보통신부의 지텐드라 싱 씨는 “BPO 등의 소프트웨어 수출 비율이 1년 사이에 26%나 성장했다”며 “2010년까지는 이 분야에서 100만 개의 일자리가 더 창출될 것이라고 예상한다”고 밝혔다.
[도시, 미래로 미래로]<17>콜롬비아 보고타
![]() 버스가 기반이 되는 보고타 시의 급행교통체계 ‘트란스밀레니오’의 정류장. 현재 총연장 41km인 중앙버스전용차로는 2016년까지 388km로 늘어나게 된다. 사진 제공 보고타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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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와 자전거가 주축을 이루는 트란스밀레니오
보고타는 제3세계의 다른 도시들처럼 질곡의 근대사를 거치며 성장해 왔다. 18세기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 건설된 보고타는 지난 100년간 농촌 붕괴에 따른 농촌 인구의 급격한 유입을 겪었다. 정치적 혼란도 인구 증가에 한몫했다. 1948년 이래 보수당과 자유당 양당이 벌인 준 내전 상태를 피해 사람들은 꾸역꾸역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 사이 보고타의 인구는 12만 명에서 50배가 넘는 700만 명으로 늘었다.
보고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몬세라테의 언덕에 서서 멀리 바라보면 그저 뿌연 갈색의 도시가 지평선 끝까지 아물거릴 뿐이다. 계획적으로 건설된 도시가 아니어서 교통체계, 상하수도 시설, 공원 등의 인프라는 열악했다. 극심한 빈부 차는 도시 안에 수많은 배타적인 경계를 만들어 냈다. 이런 혼돈 속에 1998년 엔리케 페날로사(54) 시장이 등장했다.
보고타 시민들은 그를 ‘트란스밀레니오(Transmilenio)’라는 이름의 공공교통정책과 묶어 기억하려 한다. 그가 강력히 추진한 ‘트란스밀레니오’는 BRT(Bus-based Rapid Transit), 즉 버스가 기반이 되는 급행교통체계와 301km에 이르는 자전거 전용도로체계를 주축으로 한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지원하는 또 다른 제도는 강력한 자가용 5부제 운행제도인 ‘피코 이 플라카(pico y placa)’와 ‘시클로비아(ciclovia)’다. ‘피코 이 플라카’에 따라 자가용을 모는 보고타 시민들은 닷새에 한번 꼴로 차를 두고 러시아워인 오전 7∼9시, 오후 5∼7시에 버스로 출퇴근한다. ‘시클로비아’는 1주일에 한번 차도에 자전거만 다니게 하는 제도다.
간선과 지선으로 잘 짜인 버스 시스템은 하루 75만 명을 실어 나른다. 2016년까지 4단계 사업이 끝나면 현재 총연장 41km인 중앙버스전용차로는 388km로 늘어난다.
시민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돌아오는 승용차 운행제한을 잘도 참고 지킨다. 자전거 전용도로는 녹지로 보호되며 오고 가는 방향에 따라 중앙선까지 그어져 있다. 차 없는 일요일이면 15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온다. 시는 공원을 늘리고 이것들을 잘 다듬어진 보행자 몰로 연결한다. 2005년 보고타의 범죄율은 미국의 워싱턴이나 볼티모어보다 낮았다.
○문명화된 도시의 조건
이런 도시정책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근본철학을 페날로사 전 시장은 ‘환경친화’라는 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문명화된 도시의 기초 조건은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도시 어디든 갈 수 있으며 집 바깥 어디서든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부드러운 말 뒤에는 더 나은 민주사회를 향한 강고한 철학이 있다. 사람들이 자기 차에서 내려 이웃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하는 것은 그에겐 교통 정책이 아니라 사회 통합의 일환이다. 공원과 보행자 몰에서 서로 어울리며 사람들은 시민으로서의 연대감을 갖게 되고 이것이야말로 콜롬비아 사회에 횡행하는 극단적인 폭력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정책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어떻게 3년 단임의 짧은 기간에 페날로사 전 시장은 많은 도시 공공정책들을 실천할 수 있었을까? 해답은 이미 수많은 시민단체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중 하나인 ‘시우다드 우마나(Ciudad Humana·인본도시)재단’의 아말리아 로드리게스(24) 씨는 말한다. “우리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인간적 도시를 위한 정책들을 연구해서 시 당국에 제안하고 지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자전거 도로인 시클로비아에 집중하지만 다른 단체들은 또 그들 나름의 공공영역 만들기 과제에 집중하고 있죠.”
인간 중심의 정책과 시민들의 호응 그리고 시민단체의 적극적 개입이 보고타의 물리적 풍경과 마음의 풍경을 바꾸어가고 있다. 그 변화는 보고타를 닮은 제3세계의 도시들에 새로운 희망의 단서를 던져주고 있다.
보고타=이종호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일요일인데 車들이 다 어디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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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타 시에 사는 한국인 교포 데이비드(한국명 동진·11세) 군은 촉망받는 축구선수다. 일요일이면 축구클럽에 나가 연습을 한다. 하지만 가끔은 자전거를 몰고 차도 위를 달린다. 강아지와 엄마까지 아스팔트 위로 나선다. 데이비드 군은 보고타 북쪽의 아파트에 살지만 이날만큼은 마음만 먹으면 자전거를 타고 멀리 도심까지도 내달린다. 바로 자동차 도로를 자전거를 타고 달릴 수 있는 ‘시클로비아’의 날이기 때문이다.
차 없는 거리라면 다른 여타 도시에도 있는 행사다. 짧은 거리에서 반짝 생색내기일 경우도 많다. 그러나 보고타에서는 그 의미가 다르다. ‘시클로비아’가 실시되는 매주 일요일 일곱 시간 동안 보고타 시에는 총연장 120km에 이르는 차 없는 거리가 만들어진다. 이는 기왕에 마련된 자전거 전용도로와는 별도의 구간이다.
자동차가 멈춘 길에는 시민들이 나와 자전거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거나 조깅을 즐긴다. 산책을 하는 나이든 시민도 있다. 대도시 보고타의 자동차 도로가 시민들의 앞마당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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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는 여러 가지 정치적 효과를 만들어 내는 ‘즐거운 계몽’이다.
시민들은 ‘시클로비아’를 통해 자동차만이 유일한 현대적 교통수단은 아니라는 체험을 하게 된다. 차 없는 거리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모든 계층과 인종을 넘어서는 어울림이 만들어지고 연대감이 싹튼다. ‘시클로비아’는 불평등하기 쉬운 도시사회를 더 나은 민주사회로 만들어 가는 또 다른 의미의 길(via)인 것이다.
[도시, 미래로 미래로]<18> 아일랜드의 더블린
![]() 더블린 시내를 남북으로 나누는 리피 강 주변의 풍경. 해마다 6월 16일 ‘블룸스데이’가 되면 더블린 시민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의 주인공인 블룸의 행적을 따라 퍼브를 전전한다. 현재 더블린 시내에는 약 2만 개의 퍼브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사진 제공 이영범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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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스위프트, 토머스 무어, 버나드 쇼, 오스카 와일드,
윌리엄 예이츠,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모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문호다.
1991년 유럽문화도시로 지정된 더블린 시는 첫 사업으로 이들 세계적인 문호를 기리는 더블린 작가박물관과 아일랜드 작가지원센터를 열었다.
유럽 최초의 작가박물관 건립은 문학이라는 무형자산을 통해 더블린만의 문화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후 ‘작가’는 더블린을 대표하는 문화자원이 됐다.
작품에 묘사된 거리 곳곳이 격조 있는 관광지로 변모해 간 것은 물론이다.》
○ 2006년 봄 더블린 시의 주인공은 베케트
==이미지 with 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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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맞은 더블린 시내 곳곳, 길거리 포스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바로 노벨상 수상작가인 극작가 베케트(1906∼1989)다. 4월은 베케트가 태어난 달. 게다가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2006년 4월부터 2개월 동안 더블린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베케트가 남긴 향기로 가득 채워진다.
베케트를 기리는 이번 행사의 주 무대는 더블린 시가 자랑하는 극장들이다.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초대 덤블도어 교장 역을 맡았던 리처드 해리스(1930∼2002)를 배출한 에비 시어터나 1991년 처음으로 베케트의 19개 작품을 모두 공연했던 게이트 시어터 같은 유서 깊은 극장을 중심으로 베케트의 작품이 공연된다. 베케트 기념행사는 극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베케트와 관련된 음악, 사진, 시각예술 등이 도시의 모든 문화공간을 통해 이뤄진다.
리피 강 인근 템플바의 국립사진아카이브에서는 베케트와 관련된 사진전이 열린다. 밤이면 리피 강 주변에서 조명예술가인 제니 홀처 씨가 베케트 작품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영상으로 쏘는 이벤트를 벌인다. 베케트가 졸업한 트리니티대에서는 전 세계 베케트 전문가들이 모여 학술 심포지엄을 열 예정이다. 더블린의 길거리에서는 베케트의 주요 작품의 인상적인 장면이 공연된다. 도시 곳곳이 무대가 되고 지나가는 행인의 발걸음이 멈추면 그곳이 바로 극장이 되는 셈이다.
도시 전체를 문학 축제 공간으로 이용하는 이런 경험은 이미 2004년 ‘리조이스 2004 페스티벌’을 통해 더블린 시가 성공적으로 치러낸 것이다. 매년 6월 16일 제임스 조이스(1882∼1941)의 대표작 ‘율리시스’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음미하며 주인공 블룸의 하루 일과를 그대로 재현해 보는 ‘블룸스데이’ 축제는 있었지만 작가와 작품이 온전히 축제 이벤트로 기획된 것은 2004년의 리조이스 페스티벌이 처음이었다. 이 행사는 더블린 시에 일반적인 관광지도와는 다른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냈다. ‘율리시스’의 지도를 따라 100년 전 더블린을 찾아 나서면 문학 속에서 다뤄진 장소가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보존된 장소는 일상생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작가와 관련된 문화적 공간으로 재활용되기도 한다. 더블린 외곽 바닷가, 율리시스가 시작되는 샌티코브의 마텔로타워는 지금은 조이스 박물관이다. 율리시스에 ‘모럴’ 퍼브(pub)로 묘사된 ‘데이비 번즈’라는 퍼브는 연중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 문학작품 속에 묘사된 기존 공간 최대한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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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또 다른 명물인 기네스 맥주. 더블린 시내를 흐르는 리피 강 남쪽 기네스 맥주공장에 마련된 전망대 기네스하우스는 더블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창의 원형 전망대다. 이곳에서 만난 영국인 관광객 리처드 바울리 씨는 “문학의 창을 통해 도시를 내려다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더블린 시는 문화 페스티벌을 치르면서 기존 공간을 최대한 재활용하고 각각의 문화공간을 기획된 콘텐츠를 통해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어 줌으로써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문화효과를 창조해 냈다. 도시가 제공하는 문화프로그램의 근본적인 효과는 관광수입 유발보다는 문화가 시민들의 흥미로운 일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더블린 시가 낳은 노벨상 작가와 작품을 명예와 자랑거리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시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생활문화로 재창조하는 아이디어의 원천은 바로 이런 인식에 있다.
문학작품 속의 장소와 행위가 도시 곳곳에서 재현되는 작가 페스티벌은 이제 더블린의 모든 길거리를 생활 속의 문학박물관으로 만든다. 베케트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와 리조이스 2004의 기획자인 로라 번즈 씨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와 작품이 더블린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기억되고 음미되어 문학이 도시민들의 생활문화가 되길 희망한다”고 말한다.
더블린=이영범 경기대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 문화의 거리 ‘템플바’
예술을 통한 지역개발… 도시 空洞化 막아
“퍼브를 피해서 더블린을 걷는다는 것은 마치 퍼즐게임을 벌이는 것과 같다.”
‘율리시스’의 주인공 블룸의 말이다. 퍼브의 도시 더블린에서 가장 활력 있는 문화예술공간으로 꼽히는 곳 역시 22개의 아이리시 퍼브가 몰려 있는 템플바 지역이다.
더블린 시를 관통하는 리피 강 남쪽 웨스트모얼랜드 거리와 피샘블 가(街) 사이의 세 개 블록을 일컫는 이곳의 구심점은 말할 것도 없이 1840년 세워진 템플바다.
한때 버스터미널로 재개발될 뻔했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됐고 대신 예술을 통해 지역을 활성화하는 개발계획이 수립됐다. 1991년 더블린이 유럽문화도시로 지정되자 28에이커에 이르는 템플바 지역 일대가 문화예술지구 정비사업 지역으로 지정됐다.
사업을 위해 지역 상인들과 문화예술가, 그리고 시 정부가 함께하는 템플바 커뮤니티가 형성됐다. 2001년 재개발 사업이 완료되면서 이 지역은 영화, 음악, 공연, 디자인, 시각예술의 다양한 문화 커뮤니티가 만들어 내는 문화적 활기로 새롭게 융성기를 맞았다. 템플바 커뮤니티는 이런 변화와 더불어 슬럼화한 지역의 주거지 재개발을 통해 도시 공동화를 막고 2500명의 지역주민이 다양한 문화 기회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했다.
[도시, 미래로 미래로]<19>인도네시아 수라바야
![]() 아이들 맘껏 뛰노는 골목으로 예전의 골목길은 지저분하고 허름했지만 이제는 동네가 환하고 깨끗해졌다. 주민들은 진흙탕 길에 보도블록을 깔고 집집마다 화분을 내놓았다. 오른쪽 사진은 수라바야 시 크라잔 쿠팡 캄풍의 주거환경개선사업 이전 모습. 사진 제공 ‘11월 10일 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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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도시 수라바야의 그늘에서 핀 꽃, 캄풍
죽죽 뻗은 키 큰 나무들과 곳곳에 솟은 고층 건물들, 그리고 넓은 도로. 사진으로 본 수라바야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자리 잡은 우아한 근대 도시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항공사진 속의 모습일 뿐 이 도시를 실제로 메우고 있는 것은 혼돈이다.
무법자처럼 차로를 휘저으며 달리는 자동차, 시커먼 매연을 뿜는 오토바이들. 도로변 개천에서 나는 악취는 매연과 범벅이 되어 콧속을 후벼 팠다. 넓은 길과 높은 건물로 대변되는 근대 도시의 원형은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친 것처럼 수라바야에서 실패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근대적 풍경의 도심이 수라바야의 전부는 아니다. 혼돈의 정글 같은 거리 사이로 얼굴을 내비치는 캄풍의 골목길은 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한국의 달동네처럼 인도네시아의 저소득층 주거지역을 일컫는 단어, 캄풍(Kampung). 수라바야 시민 300만 명 중 약 63%가 이곳에 살지만 거주 면적은 시 전체의 7%에 불과할 정도로 인구밀도가 높다. 현재 수라바야에는 70여 곳의 캄풍이 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인 캄풍의 골목길은 놀랍게도 냄새부터 다르다. 대도시 수라바야의 겉만 번지르르한 빈곤이 캄풍에서는 청빈한 공동체의 풍요로움으로 바뀌었다. 이 평화로운 풍경은 ‘캄풍개선사업’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최소한의 재원으로도 도시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국립 ‘11월 10일’ 공과대 건축학과 해피 산토사(65·여) 교수의 목소리는 나직하지만 단호했다. 그는 조한 실라스(70) 교수와 함께 캄풍개선사업의 주역이다.
수라바야에서 1977년에 시작돼 현재 2단계 진행 중인 캄풍개선사업의 원리는 간단하다. 사업집행구역으로 지정된 캄풍에서는 최대 20가구가 한 단위가 되어 공동체를 구성한다. 이 공동체가 주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예산 집행 계획을 제출하면 정부는 지원금을 준다. 예산 집행은 공동체 스스로 하고 정부는 집행을 감독할 뿐이다.
2004년 수라바야에서 캄풍개선사업에 집행된 사업비 총액은 3억 원 정도다. 배정되는 예산은 재료 구입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나서 하수구를 만들고 골목길을 포장한다.
○ 공동체가 마을 환경 개선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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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풍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서로를 믿는 것과 달리 정부와 캄풍이 서로를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중재자로 나선 것은 대학이었다. 대학은 각 캄풍의 현황을 조사해 예산집행계획을 보완하게 하고 구성원 간의 갈등이 생기면 조정했다.
캄풍개선사업의 슬로건은 ‘주민에 의한, 주민을 위한, 주민의 공동체’다. 이 사업은 이슬람 국가에 주는 최고의 건축상인 에이가칸상, 유엔환경상, 그리고 월드해비타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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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바야의 캄풍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어린이들은 깔깔거리며 사진기 앞으로 몰려들곤 했다. 소박하지만 공동체가 건설한 안전한 공간에서 자라난 이들이 만들 미래의 도시는 낯선 사람이 말을 걸면 모른 척하라는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어린이들이 만들 도시와는 분명 다른 모습일 것이다.
수라바야(인도네시아)=서현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
▼지원금 어떻게 쓰이나▼
‘캄풍’ 주민들의 경제적인 형편은 한국과 비교하자면 생활보호대상자와 차상위 계층의 중간 단계쯤이다.
캄풍개선사업의 특징은 이것이 단지 마을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주민들의 삶을 ‘리디자인’ 한다는 데 있다.
지원된 예산 중 마을 환경개선사업에 사용되는 비용은 전체의 20% 정도다. 나머지 예산은 각 가구의 사업 종자돈으로 사용된다. 새로 고친 집에서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자활의 발판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기금의 운영방식은 우리의 계와 거의 비슷하다.
우선 공동체의 한 가구에 약 3만 원의 예산이 지원된다.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캄풍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노점이 아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을 만한 금액이다.
약간의 이자와 함께 석 달 안에 갚는 이 기금은 다음 가구에 지원된다. 불어나는 기금은 계속 다음 가구에 지원되기 때문에 캄풍개선기금의 이름은 ‘순환기금’이다.
지원을 먼저 받으면 먼저 받아서 좋고 나중에 받으면 더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좋다. 자신이 기금을 갚지 못하면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이 나누어 갚아야 한다. 이사를 갈 때는 기금에 진 부채를 모두 청산해야 하고 이미 설정된 기준에 동의하는 가구가 새 구성원이 된다.
수라바야=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도시, 미래로 미래로]<20·끝>쿠바 아바나
![]() 호세 마르티 혁명기념탑에서 내려다본 아바나 시 전경. 사진 제공 이종호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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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5년. 절박한 상황은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생존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현재까지 상황은 비관적이지 않다. 오히려 아바나는 이제 ‘지속 가능한 도시란 어떤 것인가’라는 이 시대 대도시들의 고민에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해답은 ‘도시농업’이라는 실마리로부터 나왔고 ‘나의 녹화계획’, ‘메트로폴리탄 공원 프로젝트’로 이어져 나갔다.
○ 도시의 빈 터를 남기지 마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국영농장의 생산체제는 가족농장, 협동농장으로 대체됐다. 화학비료에 의지하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다양한 종류의 유기농작물을 기르는 농장으로 변모했고 화학비료나 제초제 대신 생태의 순환체계를 잘 활용하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사람들은 집들 사이의 빈 터마다 텃밭을 만들었고 발코니에 내놓은 화분에도 집에서 먹을 푸성귀를 키웠다. 아바나 시 면적의 40% 이상이 농지로 바뀌었다. 건물이 낡아 헐리면 당국은 그곳을 공원으로 조성했다. 그 결과 도시의 생태적 건강성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서구의 많은 도시가 확보하려 애쓰는 비오톱(biotop·다양한 생물종의 공동 서식 공간)이 아바나 시내 곳곳에 자연스레 형성됐다.
‘나의 녹화(綠化)계획’은 아바나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현저히 줄어들었던 녹지는 조금씩 예전의 울창했던 숲으로 회복되어 나갔다. 급기야 아바나 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알멘다레스 강을 따라 원시림에 가까운 생태계가 자라나게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공원 프로젝트’가 작동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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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도시의 허파 한가운데를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 자연스러움은 사실 치밀한 계획에 따른 것이죠.”
아바나 시 도시공원공사에 소속된 둘체 알몬트 씨의 설명이다.
알멘다레스 강 한가운데 호세피네 섬에 서면 도무지 이곳이 인구 220만인 도시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 울창한 열대림이 하늘을 덮고 포장 없는 작은 길들이 마치 그냥 생겨난 듯 자연스레 걸음을 이끈다. 강물은 소리를 내며 바다로 흐른다.
이 지역에 대한 첫 번째 도시공원계획은 1920년대 프랑스 조경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졌다. 1940년대를 거치며 공원은 동식물원과 놀이시설, 산책로 등이 있는 상투적인 모습의 근대적 공원으로 ‘정비’됐다. 도시가 확장됨에 따라 공원은 인구가 밀집된 주택지역에 둘러싸였다. 시간이 흐르며 강물은 점점 오염되고 유역에는 쓰레기가 나뒹굴게 되었다.
그러나 ‘도시농업’을 통해 자신감을 얻은 시민들은 새로운 도시 공원계획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1994년 지역의 활성화와 환경개선에 역점을 둔 도시공원계획이 건축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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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 같은 서방세계의 정부와 시민단체들은 ‘메트로폴리탄 공원 프로젝트’에 재정 지원까지 해 가며 그 변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이곳에서 자기들의 도시를 위한 대안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 내며 또 하나의 다른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대를 나온 아시아 전문가 호세 페레(50) 박사의 말이다. 모든 전망이 장밋빛은 아닐지라도 아바나가 말하려 하는 것은 분명하다.
‘도시여, 잠시 멈추어 뒤를 돌아보라. 혹시 미래가 그곳에 있을지도….’
▼농업으로 이룬 여유 거리마다 리듬 리듬▼
1961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아바나 교외의 골프클럽 잔디 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멋진 장소를 어떻게 ‘인민’들과 함께할 것인가.
그 결과 음악 미술 무용을 가르치는 새로운 국립예술대(ISA·Instituto Superior de Artes)가 설립됐다. 건축가 리카르도 포로 씨는 아열대의 기후에 걸맞고 구조와 재료 그리고 공간배치를 통해 쿠바의 지역성을 추구하면서도 혁명의 열정을 상징하는 건물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나 공사는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혁명을 둘러싼 건축적 해석은 저마다 달랐고 이내 논쟁에 휩싸였다. 오랜 시간 학교는 일부 완성된 시설만으로 운영됐다. 그리고 지금 학교 시설은 다시 당초의 계획에 따라 건설되고 있다.
학교를 둘러싼 변화는 지금의 아바나가 ‘농업도시’를 통해 이룬 여유를 드러내는 문화적 징표다. 국립예술대만이 아니다. 아바나의 명물 잉글라테라 호텔 노천카페에서는 4인조 밴드의 흥겨운 리듬과 거리의 소음이 활기차게 뒤섞인다. 여인들은 리듬 위를 걷고 있다.
아바나=이종호·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